"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선거시즌에는 대기업 그룹 회장들의 해외출장이 잦아집니다. 업무 때문에 출장을 나가는 사례도 없지는 않겠지만, 후보들의 '협조 요청'을 피하기 위해 급조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전경련 A상무) 대통령 선거와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내년으로 다가오면서 기업들의 고민이 커졌다. '경제정책이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갈수록 씀씀이가 커지는 후보들의 정치자금을 대야 하는 현실이 버겁기만 하다. "가뜩이나 경기 침체로 죽을 맛인데 선거판에 뒷돈을 대야 할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경비 절감을 위해 명예퇴직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내쫓고, 신입사원 채용까지 동결한 마당에 정치판 돈줄을 댄다는 게 말이 됩니까"(B그룹 C상무) 기업과 정치자금의 함수관계는 선거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평상시에도 국회의원들의 각종 개인후원회가 이어지고 중앙당 차원의 후원회도 열린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만만한 '봉'인 기업들을 겨냥한 이벤트임은 물론이다. D그룹 E부사장은 "일단 후원 요청이 들어오면 그룹 재무팀에서 취합해 처리한다"며 "특정 계열사에 부담이 집중되지 않도록 계열사간 당번을 정해 주는게 구조조정본부의 주요업무중 하나"라고 말했다. 회사나 회장 명의로 후원회에 내는 '세금'의 납부 규모는 50만∼1백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정치자금법에 따라 법인이 낼 수 있는 연간 후원금 한도는 정해져 있다. 지구당 후원회는 5천만원, 중앙당 후원회는 2억원. 이들을 합친 연간 한도는 2억5천만원이다. 공식 후원금에 대해선 국세청이 손비(損費)처리를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부담이 덜 된다. 문제는 비공식적인 후원금이다. F그룹 G상무는 "비공식 후원금은 그룹 내에서도 몇 사람만이 아는 내용"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가장 큰 그룹이 1백억원을 내면 다음 그룹들은 70억원,50억원, 30억원 하는 식으로 그룹규모에 따라 금액이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이다. 기업들은 정.재계가 '정치자금'을 연결고리로 삼아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사시(斜視)에 억울해 한다. "요즘같이 정보가 공개돼 있는 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돈주고 사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손 벌리는 유력 정치인을 외면했다가 괘씸죄로 걸리지 않으려다 보니 '세금'으로 내는 것이지요" H그룹 I전무의 푸념이다. 손희식 기자 hssoh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