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시대 다산경제학의 재발견 ] 이영훈 <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 >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재분배경제였다. 서양에서는 16세기 이래 사유재산제도가 성숙하고 금융 보험 운송 등 시장경제의 기초 설비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와 별도의 운동원리를 갖는 경제를 이해하고 조절하기 위한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성립하게 됐다. 시장경제의 역사와 유산이 그리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근대화 과정은 20세기에 들어와 선진국의 지배와 영향을 받으면서 수행됐다. 그렇지만 이미 19세기초에, 비록 맹아적 수준이긴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주장한 선각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다. 다산은 국가가 백성의 살림살이를 고르게 하고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백성의 살림살이에 간섭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일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적정한 수준의 세금만 공정하게 거두어라, 그러면 백성은 스스로 알아서 잘 살게 되고 나라도 부강해진다"고 다산은 강조했다. 우리는 다산의 이런 주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을 발견한다. 다산 경제학의 기본 지향은 그의 '환곡을 논함'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9세기 초 당시 조선왕조는 1천만석(1석=약 1백리터)의 벼를 환곡(還穀)이라 해서 비축해 두고 봄에 농민들에게 푼 다음 가을에 10분의 1 이자를 붙여 거둬들였다. 봄철에 모자라는 종자와 식량을 공급함으로써 백성의 살림살이를 안정시킨다는 이념에서였다. 다산은 이 제도가 둘도 없는 악법이라고 비판했다. 재분배 경제의 막대한 비용과 비효율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어떻게 해서 이같은 선진 수준의 사상에 도달했던가. 젊었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주지하듯이 다산의 20대와 30대는 국왕 정조의 촉망이 두터운 유능한 관료였다. 이 기간 그는 아직 전통 성리학의 재분배 이념을 벗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누구보다 그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에게 정치란 오직 백성을 골고루 살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같은 그의 초기 주장을 완성한 것이 1799년 그의 38세때 작품인 '여전제'(閭田制) 개혁론이다. 전국의 모든 토지를 공유로 한 다음 농가 30을 공동노동과 공동분배의 단위로 편성하는 급진적인 공산주의적 개혁이 그 내용이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이 여전제론에 근거하여 다산을 위대한 사상가니 혁명가니로 평가하고 있지만, 이는 정말 커다란 오해다. 그같은 공산주의적 개혁은, 다시 말해 재분배경제의 평균주의적 이념은 본디 중세사상의 한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조선성리학의 역사에서 보더라도 비록 다산처럼 급진적이진 않지만 이미 많은 학자들이 같은 취지의 주장을 펼쳐 왔기 때문이다. 노년의 다산은 자신이 평생 쓴 글들을 문집으로 정리하면서 이 여전제론에 대해 "이는 나의 38세에 쓴 것이나 노년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다산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자로 만든 중요한 변화는 1801~1818년간 불우했던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이 40이 되도록 양반가의 자제로서, 또 관료로서 생활했던 그가 농촌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알 리는 없었다. 그러했던 그가 처음 몇 년간 유배지 강진에서 겪은 사실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놀랄 만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소개한다. 당시 강진에서는 부유한 지주가 아니라 가난한 소작농이 세금을 내고 있었다. 이를 본 다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상소의 붓을 들었으며(실제 올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선 백성의 부모된 왕으로서 이런 천하의 악법을 당장 고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라고까지 극언했다. 그렇지만 유배기 말년의 다산은 그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오래 있으면서 그 습속을 알고 보니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곧 그것은 소작농이 볏짚을 차지하는 대신 세금을 부담하는 지주.소작간의 계약 상의 문제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다산의 현장 체험은 다 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는 민간의 습속을, 심지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까지 국가가 한 가지로 법을 세워 규제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는 이를 '순속(順俗)'이라고 표현했다. 순속하지 않고 억지로 재분배적 개혁을 강행한다면 큰 혼란만 발생함을 다산은 여러 글에서 누차 강조했다. 다산 학문의 위대한 점은 이같이 농촌사회의 현실로부터 취득한 지혜를 인간.자연을 조망하는 철학의 기초로 채택해 기존의 전통 성리학과 전혀 상이한, 사실상 그것을 극복한 새로운 사유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전통 성리학이 인간을 인의예지의 본성을 지닌 도덕적 존재로 본 것과 달리 다산은 인간의 본성을 기호(嗜好)로, 쉽게 말해 욕망으로 간단히 정의했다. 인간은 그 본성에서 부와 귀를 추구하는 욕망을 갖는다. 이 욕망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다.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실현되도록 제도적 환경을 잘 조성하는 것일 뿐이다. 독자들은 이로부터 이기심을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하고 영리의 자유를 추구했던 영국 고전파 경제학과 그 본질에서 통하는 논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인간관의 정립과 함께 당시의 국가체제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모색한 것이 유명한 '경세유표'다. '경세유표'는 '백성을 골고루 잘 살게 하는 것은 요순 임금도 어려워한 바'라는 전제 위에서 어떻게 하면 사회적 총생산을 극대화할 것인가, 그를 위한 사회적 분업은 어떠한 원리로 편성돼야 하나, 중국과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는 어떠한 방책으로 막아야 하나, 공정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정부는 어떠한 형태로 구성돼야 하나 등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