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 서울대 농업시설공학 교수 > 올해도 쌀 생산에 알맞은 날씨가 많아 풍년이 예상된다고 한다. 5년 째 풍작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 결과 비축시설을 상회하는 쌀 수확이 예상되어 정부는 "쌀 증산정책을 포기한"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치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쌀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으므로 지난 1980년 냉해로 인해 겪었던 식량위기는 없겠지"하며 안심은 하지만,현재 농가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쌀농사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정책이 또다른 형태로 우리를 어렵게 하지는 않을까 다소 걱정 된다. 과거의 예에서 우리는 이와같은 조치가 해로운 부수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살집이 없으니 단숨에 2백만호를 짓자 해서 때없는 건설경기와 북새통을 치르고 나면 수도권정책이니 환경정책이 뒤죽박죽이 되고, 부의 편중에 의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경제안정을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밀려 도로 항만 수자원개발을 소홀히 했다가 물류비용의 증가로 수출경쟁에서 밀리고,각 가정에서는 좋지 않은 물을 정수해 마셔야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쌀 생산에는 농민과 농지와 수자원의 세요소가 필요하다. 토지만 있다고 해서 좋은 농업국이 될 수 없는 것처럼,세가지 생산요소가 적절히 결합돼야 좋은 농업국이 될 수 있다. 행여 증산 포기의 선언으로 이 세요소가 균형을 잃게 되면 우리나라의 농업기반이 기초부터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농업에서 쌀 생산의 중요성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하다. 밭농사와는 달리 물을 대어 짓는 농사이므로 노동력도 절감이 되고,가격 지지정책을 펴 왔으므로 가장 경제성있는 품목이었으며,쌀에 대해서는 모든 국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공통된 인식이 있으므로,농업정책의 초점을 쌀의 생산과 수급에 집중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 쌀 증산정책을 포기한다면 이와같은 효과중의 상당 부분이 상실될 것이므로 이에 대응해 쌀 생산기반을 파괴시키지 않을 효과적인 보완책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부의 쌀이 남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현재의 쌀 소비는 국민 1인당 연간 90kg 가량 된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국민 1인이 소비하는 쌀은 연간 1백40kg정도 됐다. 이때는 보리를 섞어먹고도 연간 4천3백만섬의 수확이 있어야 속칭 안남미로 알려진 장립형 쌀을 수입하지 않아도 되었지만,근년에는 3천2백만섬만 수확해도 문제가 된다. 만일 지금처럼 항상 기상이 순조롭고,모자라는 곡식을 언제든 구입할 수 있도록 세계정세가 유지되며,우리 국민 모두가 서구형 식생활을 견지하고,남북통일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고,세계 속에서 남을 지원하는 응분의 역할도 할 필요가 없다면 쌀 생산은 감축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후는 언제 바뀔지 모르고,식생활이 항상 서구형만을 견지한다는 보장도 없다. 더욱이 우리는 통일에 대비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 우리 국민이 주식으로 하는 차진쌀인 단립형 쌀은 우리나라와 중국 북부 및 일본이 주요 소비지이며,세계 쌀 생산량의 20% 남짓 된다. 이 지역을 제외하고 현재 단립형 쌀을 생산하는 곳은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지이나,수자원 부족으로 그 생산량이 제한되고 있다. 5년 연속 풍작으로 비록 지금은 쌀이 남아돌지만,극심한 흉년이 들어 쌀 부족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는 식량안보문제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수자원의 효율적인 이용을 논의하는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학술대회가 9월16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는 모두 92개 나라에서 7백여명의 물 이용관련 전문가들이 참가한다. 쌀 증산정책의 전환에 따라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자원의 장기적인 이용에 관한 선진기술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이번 회의의 소득과 관계기관의 부단한 정책개발로 합리적이면서 시대에 알맞은 농업정책이 확립되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