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나라와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워 기싸움을 함으로써 반목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17일 제 53주년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우리 정치권의 현주소를 이같이 꼬집었다. '상생의 정치' '국민우선 정치'를 외쳐온 여야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빌미로 정쟁의 대장정에 돌입,각종 민생현안을 외면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담긴 연설이었다. 자연히 이 의장의 이날 경축사는 한탄조로 흘렀다. 게다가 경축식에 참석한 민주당 김중권 대표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도 시종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채 냉담하게 자리를 지켜 식장은 썰렁한 기운만 감돌았다. 국회의장이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이처럼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푸념조로 주문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 이상 다수의 힘의 논리가 횡행해선 안될 것이며,반대를 위한 반대도 세기의 물결 속에 흘려 보내야 한다"(이 의장,2000년) "대화하는 국회가 어느때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다.의회민주주의는 함께 나누는 정치체제다"(박준규 전 의장,99년)는 식의 발언은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새로운 국회로 거듭나야 한다'며 정치권의 개혁을 요구하는 경축사는 이제 식상하게 들리는 게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기초단체장 및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때 내년에도 정치권의 구태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갈등기류는 오히려 확산될 개연성이 높은 편이다. 벌써부터 8월 임시국회도 언론 국정조사 공방에 밀려 파행운영될 것이란 관측이 강하다. 때문에 내년 제헌절 국회의장 경축사도 올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란 우려가 드는게 사실이다. 오히려 대선을 겨냥,여야간 장외정치가 횡행하면서 국회의장 홀로 의사당을 지켜야 하는 웃지못할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국회의사당 정면에 세워진 해태상 밑에 1백병의 포도주가 27년째 묻혀있다. 남북통일 등 좋은 일이 생기면 자축용으로 쓰기 위해 묻어 두었다고 한다. 여야가 파행없는 국회를 기념하며 이 포도주로 축배를 드는 제헌절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김형배 정치부 기자 kh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