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기원전 15세기께 이미 갑골문자를 쓰고 있었다. 공자 맹자가 나타나 '사서삼경'이라는 유학의 경전들이 정비된 것은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일이다. 우리 선조들과 중국과의 문화적 교섭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삼국시대다. 삼국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3~4세기에 이르면 사서편찬 불교전래 학교설립 등으로 한자 한문에 능숙한 지식인이 배출됐다. 7~8세기에 오면 한반도의 한 모퉁이 신라에도 당의 제도를 본뜬 국학이 세워지고(682년) 지명 관직명의 한자화(758년)가 이루어진다. 삼국초에 전해진 '논어(論語)'가 일반화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642년 죽죽(竹竹)이라는 화랑이 인용한 '논어'의 구절이 나온다. 설총이 유교경전을 이두로 읽었다거나 강수(强首)가 유교를 배워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는 것 등은 유교적 교양의 바탕인 '논어'를 읽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논어'는 국학의 중요한 교과목이었고 인재를 선발할 때 필수과목도 '논어'였다. 부산대 박물관이 최근 경남 김해시 봉황동 저습지에서 발굴한 7세기 전후의 목간(木簡) 1점을 적외선 촬영을 통해 해독한 결과 '논어' 공야장(公冶長)의 구절(57자중 42자판독)이 적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교경전 목간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7세기께 한반도 전역에 이미 유교가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종이가 귀했던 시대에 나무에다 글을 적어 책이나 문서로 사용하던 목간은 75년 경주 안압지에서 50여점이 최초로 발굴된 이래 함안 성산산성,부여 궁남지,능산리 등에서 모두 1백여점이 나왔다. 하지만 안압지 목간처럼 대부분 일부만 해독됐을 뿐 결정적 사료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전문학자가 없다는 연구의 한계도 문제다. 일본에는 고대 목간이 20여만점이나 되고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만여점을 인터넷에 올려 목간학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귀중한 1차사료가 제대로 사료구실을 하도록 학자들에게 공개하고 연구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목간은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