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일정 자산 규모 이상의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9월 정기 국회에 관련법을 상정하여 내년 1월부터 시행할 예정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집단소송제 도입의 취지는 분명하다. 내부자거래,시세조종,분식결산,부실공시 등 각종 불법행위의 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비용이 너무 커 소송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피해자 가운데 그 집단을 대표하는 대표 당사자가 나와서 소송을 제기하고,판결의 효력은 피해자 전체에게 돌아가게 하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소액피해자들의 막대한 집단 피해보상을 두려워하여 기업 경영진들이 소액주주의 권익에 반하는 행동을 자제하는 억제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훌륭한 장치를 왜 이제야 도입하는지를 안타까워 해야 하는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적인 상황에서 집단소송제는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우려가 높다. 혹자는 기업이 떳떳하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문제는 떳떳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드는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많은 집단소송의 경우 법원 판결까지 가기보다는 합의를 통해 서둘러 사안이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 비용을 줄이고 부정적 여론을 피해야 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판결까지 가지 않고 서둘러 합의를 보려고 할 것이고,고도의 경영판단을 사법적 심판에 맡겨 반드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변호사도 합의를 보려고 할 것이다. 합의를 노리고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부추기는 상황이 연출되어 소액주주 권익보호라는 당초의 취지는 퇴색하고 기업에서 소송업무 종사자들로 소득이 이전되는,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소득분배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증권집단소송의 95%이상이 화해 또는 합의로 종결되었고,합의금도 피해규모와 상관없이 결정되었다는 점은 집단소송이 증권투자에 대한 보험 같은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피소송인은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의혹을 받는 한국적 풍토에서 집단소송제가 전략적으로 남용될 가능성과 그것이 몰고 올 피해의 파장은 상상외로 크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인의 청탁,관료의 부당한 요구,민간단체의 막무가내식 지원요청 등 각종 준조세에 시달리는 한국의 기업이 집단소송제가 악용되는 경우 치러야 할 대가는 기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집단소송제 도입 취지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기업의 불법적 행위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라면,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노력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고 보완하는 것이 일의 순서다. 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이 한국을 저평가할 때마다 한국정부는 제도는 다 갖추어 있는데 시행이 제대로 안될 뿐이니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라고 항변한다. 제도는 있는데 시행이 안된다는 것,바로 그것이 한국이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다. 현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보듯이 제대로 만들어진 부실기업정리 제도와 법 위에 정부가 군림하는 과거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 않은 그 현실을 그들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분식회계부터 근절해야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재벌들의 분식회계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그저 송사리 몇마리만 잡고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분식회계를 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정치인 관료들을 모두 감방으로 보내고,눈앞의 재물이 탐나 분식회계를 한 회사를 폐쇄시키는 조치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던가. 집단소송제는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왜 이제야 도입하는지 아쉬워 할 일이 아니라,그 남용과 오용 가능성과 피해를 면밀히 검토한 이후로 시행을 연기해야 한다. 소액주주 권익 보호의 이름 아래 지배주주의 정당한 권익이 침해당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날카로운 칼날을 전문요리사에게 맡길 때와 술취한 사람에게 쥐어 줄 때 그 결과가 각각 어떻게 나타날지는 상상에 맡길 일이다. byc@mm.ewha.ac.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