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 워싱턴 특파원 > 미국 문화예술의 터전인 케네디 센터가 한국 발레 '심청'으로 감동의 도가니다. 한국의 대표적 고전을 무용의 세계로 승화시킨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이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물든 미국인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겐 심청 그 자체가 '한국적 효(孝)'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이를 이해할 리 없다. '원더풀'을 연발하던 미국 관객이 막이 내려왔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무대커튼에 새겨진 대형 '효'자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지만 한 단어보다는 복합적 개념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부모에 대한 사랑(love) 순종(obedience),그리고 희생(sacrifice)을 모두 뭉뚱그린 개념 정도'로 알고 있다"고 했더니 "고맙다"며 "정말 좋은 소재를 다룬 아름다운 발레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미국 관객의 평대로 발레 '심청'은 한 폭의 그림같은 한국적 서사시였다. 민주노총 파업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력시위, 가뭄,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 지루한 대북(對北) 신경전 등 즐거운 소식이 없던 상황에서 '심청'은 한 폭의 시원한 청량제 그 자체였다. 지난 3년간의 워싱턴 특파원생활 동안 많은 한국 정치인, 장관, 고위관료들이 워싱턴을 다녀갔다. 크게 보아 이들도 워싱턴이라는 큰 무대 위의 출연진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공연은 '관중을 고려치 않은 무리한 주제와 타이밍 선택, 알맹이 없는 내용,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영어를 쓰면서도 통역을 거부하는 낯뜨거운 자존심'등으로 얼룩 진 '수준이하의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재벌개혁을 설명하겠다"며 쟁쟁한 교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엉뚱하게도 동서 냉전종식을 열강(?)하던 '엉뚱파' 고위관료도 없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미국인을 겨냥한 공연이어야 할 이들의 '워싱턴 공연' 대부분은 한국 TV와 카메라를 겨냥한 '국내 과시용'이었다는 점이다. 국민세금으로 지원되는 이들 한국 지도층의 '촌스러운 워싱턴 공연'과 비교해볼 때 관중들의 기립박수와 환호로 보답받은 '젊은 세대의 심청'은 화려한 무대, 잘 다듬어진 무용, 음악의 조화등 3박자로 어우러진 보기 드문 수준작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레 '심청'의 화려한 비상(飛翔)은 예정된 것이었다. 미국 최고의 오페라무대인 케네디센터가 '심청'을 무대로 초청한 것 자체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심청'은 워싱턴 말고도 뉴욕의 링컨센터, 로스앤젤레스의 도르시 섄들러 파빌리언(Dorthy Shandler Pavillion)에서도 공연을 갖게 되어 있다. 이는 미국 3대 오페라 무대를 휩쓰는 것이다. "나는 우리 한국 아이들의 신체구조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중시했습니다.다리가 길어지고 잘만 가르치면 오히려 덩치가 큰 서양인들보다 발레를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냉전종식 이후 발레 종주국인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고 따라서 발레 지도자들을 우리가 초빙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연출 무대 음악 등 부문별로 노조화(勞組化)되어 있는 외국과 달리 우리는 모두 함께 일하는 가족같은 화목이 있었습니다.오늘의 '심청'은 이들 모든 여건이 빚어낸 결정체입니다" '심청'을 뒤에서 만들어낸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총재의 말이다. '심청'은 중국을 소재로 했던 '뮬란'처럼 만화영화로 꾸며볼 만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13개국에서 선발된 외국 무용수까지 포용하고 있는 유니버설 발레단은 그래서 이름도 유니버설이다. '무언(無言)의 외교관'들인 이들 '다국적 심청'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국제화요, 문화수출이며 한국상품 이미지 제고를 위한 주역으로 손색이 없다.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