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원 < 한국디자인진흥원 원장 ceo@kidp.or.kr >

콩 반쪽에 세필(細筆)로 글자를 쓴다고 하면 몇 자나 쓸 수 있을까.

1960년대만 해도 이러한 세밀한 재주가 마치 디자이너의 중요한 기량인 양 여겨졌었다.

또 종이에 얼룩이 지지않게 얼마나 깔끔하게 색을 칠할 수 있느냐도 중요한 능력으로 인정됐다.

한마디로 미술적 소양이 중요시되는 시대였다.

70∼80년대에는 얼마나 능숙하게 디자인소재를 다루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래서 멋있는 글자체를 고르거나 스프레이 등을 동원하는 다양한 디자인 기법들이 사용되었고 솜씨와 감각이 디자이너의 능력을 가늠했다.

이때는 기술적 소양이 디자인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였다.

그러나 90년대부터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전략적 컨셉트의 중요성이 크게 대두됐다.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세밀한 묘사나 갖가지 디자인 기법을 쉽게 적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얼마나 창의적인 컨셉트를 제시하느냐가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각 시대에 따라 디자이너의 역할도 달라져 왔는데 21세기를 맞아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대폭 바뀌고 있는 요즈음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무엇일까.

디지털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계속 확장되는 온라인 사이버 환경이다.

이제 디자이너는 미술적·기술적 소양은 물론 창조적인 능력을 통합해 사이버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자면 첨단 디지털 매체를 이용해 온라인 상에서 작업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의 속성인 신속성,분해 및 반복가능성,시뮬레이션 및 가변성이라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첨단 디지털장비의 사용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장비는 종전과 같이 붓이나 스프레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디자이너는 마우스 하나로 훨씬 복잡한 디자인작업을 쉽게 할 수 있게 됐다.

손은 디지털 매체를 사용해 가장 빠르고 능률적인 디자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아날로그시대의 따뜻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세필에서 마우스로 디자인 도구가 바뀌었다해도 인간을 존중하는 사고는 디자이너가 항상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