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양성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현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조선 개국초인 1398년이었다.

그해에 공자의 문묘와 강당인 명륜당,기숙사인 동·서재(양현재)등 교육시설이 완공됐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 2백명중 반은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한 정규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비정규생으로 사학(四學)이나 향교의 생도와 고위관료의 자제였다.

모든 비용은 성균관의 학전(學田)을 관리하는 양현고(養賢庫)가 부담했다.

아침 저녁 식사때 서명을 하면 하루에 원점(圓點)1점을 받게 되고 3백점 이상을 받은자에게만 문과 초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재학연한이 따로 없고 과거에 급제하는 날이 졸업날이었던 셈이다.

유생들은 매일 교수인 학관에게 가서 배당받은 경서를 외우는 ''학관일강''외에도 열흘만에 한번씩 시와 논문시험을 보았다.

예조(禮曹)에서 한 달에 한차례 보는 ''예조월강''이라는 경서시험과 연 2회 6조 당상관들의 논문시험도 따로 있었다.

기숙사생활은 유생자치기구인 재회(齋會)가 감독했다.

학칙인 학령(學令)에 따라 매달 초하루면 문묘 4배례의식을 지켰다.

매일 새벽 북 한번을 치면 일어나서 두번 치면 세수하고 세번 치면 2열로 마주보고 읍례를 한뒤 식당에 들어갔다.

밥상 대신 각기 마포를 깔고 밥과 국, 간장 김치 나물 식혜 절인고기 생채 한접시를 반찬으로 구령에 따라 절도 있게 먹어야 했다.

매월 8일,23일에는 부모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락됐다.

성균관대학교가 1960년 부활시켜 유학·동양학부 장학생 30여명의 기숙사로 활용해오던 양현재를 비워야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다.

재단법인 성균관이 유료 유림숙박시설로 쓰겠다고 사용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학양성의 법통계승이란 점에서는 대학측이 유리할 듯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문묘는 보물141호,양현재를 포함한 그 일원은 사적 143호로 지정돼 있어 국가 소유다.

문화재청이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비거주원칙을 내세우면 양측 다 불리하기만 하다.

자중지란으로 6백년 대학의 전통이 끊어진다면 그처럼 애석한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