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하늘 나라로 간 지도 벌써 한달이 지났다.

그의 족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이곳 워싱턴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특히 그를 기념하기 위해 ''정주영 룸''을 따로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맬컴 월럽 전 상원의원을 ''정주영 스칼라''로 위촉해 놓고 있는 헤리티지재단과 맥스 코든 교수를 ''정주영 석좌''로 두고 있는 존스 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등은 ''정주영 기념 강연''을 기획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특히 1992년 대선을 집중 취재했던 월스트리트저널의 스티브 글레인 기자는 필자가 통역을 맡았던 정 명예회장과의 단독회견을 떠올리며 그의 타계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글레인 기자는 정 명예회장에게 "김영삼 김대중 후보와 비교해서 스스로 경쟁력 있다고 생각하는 면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글레인 기자를 유심히 쳐다보던 정 명예회장은 "나는 명동 동대문 남대문 사채시장에서 ''달러 돈''을 빌려 써 본 경험이 있다.

이것은 양김(兩金) 후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나의 가장 돋보이는 경쟁력"이라고 대답했다.

"급전(急錢)을 빌려 쓴 것이 무슨 경쟁력이 되느냐"고 되묻는 글레인 기자에게 "모르는 소리 말라, 우리나라의 가장 골치 아픈 개혁대상의 하나는 금융산업인데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면 사채시장부터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달러 돈'' 때문에 피눈물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회사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을 경험해 본적이 없는 두 후보에게서 제대로 된 금융시장개혁을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달라는 것과 같다"는게 그의 대답이었다.

요즘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고리사채 문제를 예견이라도 한 듯한 발언이었다.

이어 정 명예회장은 "나는 세금도 많이 내 본 사람이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돈을 벌어 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금의 중요성도 잘 모른다. 그들이 아는 세금은 ''머리 속의 세금''이지만 내가 아는 세금은 ''피부와 심장속의 세금''이다"고 말을 이었다.

세금시장의 밑바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조세개혁을 부르짖은 정 명예회장이었다.

"나는 건설공사도 많이 해보았다. 따라서 건설부정을 잘 알고 있다.
나의 경쟁력은 이 부문에서도 두 후보를 확실히 앞선다. 나는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실은 반값보다도 더 낮은 가격에 공급할 수도 있지만 유권자들이 너무 황당하다고 외면할지 몰라 그냥 반값이라고 오히려 올려 발표한 것일 뿐"이라는 게 정 명예회장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토지공사의 본업은 토지개발이다. 그런데 토지공사는 국민을 상대로 땅장사를 벌여 막대한 눈먼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토지공사가 더 이상의 땅장사를 못하게 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아파트 값은 땅값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땅값에서 줄어드는 비용만으로도 큰 절감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뇌물 등 공사부정에서 절약할 수 있는 돈, 그리고 공기단축 자재관리 등 건설공사를 효율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원가절감을 합하면 아파트는 반값 이하로 내릴 수도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한 기간도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나라는 정치.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퇴보만 했다.

정 명예회장의 예견대로 조세 금융 공사부정 정치자금 등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것 하나 개선된 것이 없다.

부패만연과 이로 인한 국민적 불신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한다.

한국은 물론 태평양 건너 워싱턴까지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로 불렀던 정 명예회장 타계를 아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양봉진 < 워싱턴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