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 김영사 사장 pearl@gimmyoung.com >


4월을 눈앞에 두고 눈이 내렸다.

어느 집 마당에서는 개나리가 개봉박두를 기다리는 영화처럼 바야흐로 노란 폭죽을 터뜨릴 준비를 잔뜩 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뜬금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 계절에 설마 눈일까 싶을 정도로 한 송이 두 송이 조심스럽게 땅으로 내려오던 눈발은 점점 굵어지더니 급기야 몽글몽글한 함박눈으로 변해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황당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해서 나는 눈에 빠져들었다.

눈은 금방 그쳤다.

그토록 격렬하게 내렸건만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땅에 있던 눈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어떤 사람은 내가 눈 이야기를 하자 미처 못 본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겨울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는데….이상해,왜 또 보고 싶지?"

사실 나도 그랬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내게 지난 겨울의 눈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이틀 정도 출근을 못한 적도 있다.

바닥에 쌓인 눈은 차라리 재앙같았다.

그런데 이 의외의 계절에 이토록 짧게 내린 눈에서 나는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눈의 모습을 보고 즐긴 것이다.

대학시절 수업시간에 한 교수님이 사람들은 왜 지나간 시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스무살 남짓한 우리들은 그때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교수님은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생명은 유한하기에 소중하며 저녁노을도 곧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넋놓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얘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불멸이라는 것도 사실은 재앙일 수 있지 않을까.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는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던 한 인간의 비극적 종말이 나온다.

불멸의 대가로 얻은 것은 영혼의 파멸이었다.

유한하고 소멸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불멸도,영원도 없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그때그때의 ''의미''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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