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곳은 압해도의 남쪽 바닷가다.

어릴 때 나는 긴 선로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 기차를 몹시 타보고 싶었다.

붉고 흰 수기를 들고 신호하는 철도원도 멋져 보였다.

한때는 철도원이 되는게 꿈이었다.

갓 결혼했을 때 나는 시댁 마을에 가기 위해 병점이라는 곳에서 기차를 내려 한시간 가량을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서 들어가곤 했다.

그곳은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돌모퉁이''라는 뜻인 그 돌모루 마을까지는 너무 먼 느낌이었다.

거기엔 여울이 있었다.

잔디가 깔린 둑길도 걸었다.

들길을 걷다보면 파르스름한 공기가 만져질 정도로 오염이 안된 때였다.

논이나 밭둑의 마른 풀들을 태우며 한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못해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곳엔 비록 가난했지만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외지로 유학 보내 공부시키고 성가시킨 시부모님이 살고 있다.

빛바랜 사진첩 속의 이야기 같지만, 오염되지 않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그립다.

고향이란 단순히 태어나 태를 묻고 온 고장만이 아니라, 나이 들어도 잊지 못하고 늘 가고 싶은 마음의 공간이다.

그 돌모루 입구 석우리에까지 오느라 지칠 때쯤 내 눈을 반짝이게 하는게 있다.

규모는 작지만 홍씨 마을 집성촌이 보이고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를 쓴 노작 홍사용의 시비가 그곳에 세워져 있다.

한 시대를 시로 주름잡은 홍사용의 시 구절을 읊으며 그 돌모루 입구를 지났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낡고 볼품없는 시골집이지만 헐지 말고 그대로 보관해서 이 다음에 시집도서관으로 활용하자고 말했다.

이런 추억거리가 묻어 있는 시골, 아직도 쾌적하고 신선한 공기가 남아 있는 동탄면 석우리 일대가 이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파괴되려고 한다.

대대로 살아온 삶의 둥지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

어느날 느닷없이 ''화성 신도시개발 계획안''이라는 것이 정부 당국의 결정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농사를 짓거나 생업의 터전을 그곳에 둔 사람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농사일과 고향을 지킨다는 자부심 하나로 그 땅을 지켜온 농부들은 설마하며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요즘 구체적 계획안이 떠오르며 곧 수용령이 떨어진다는 소문에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커다란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다.

오랫동안 자연에 묻혀 살던 사람들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 발표 한마디에 그들은 생업을 빼앗기고 어디론가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한다.

이미 주변은 땅값이 오를대로 올라 시가보다 훨씬 못한 보상비로는 대체농장지 장만에 엄두를 못낸다.

결국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분신같은 흙을 붙안고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은 개발논리에 밀려 갈곳 모르고 마냥 불안해하고 있다.

몇대조 조상이 묻힌 선산도 옮겨야 할 판이다.

지금까지의 예로 보면 정부주도의 신도시 개발안이 발표되고 수용권이 발동되면 토착주민들은 예외없이 쫓겨났다.

소박한 삶이지만, 대대로 세거해 고향을 지키는 농심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뿌리뽑힌 고향이 되어 또다른 실향민을 낳고 있는 것이다.

요즘 돌모루에는 절망감에 젖은 농민들이 생전 들어보지 않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주민 의사 무시한 신도시 개발정책 반대''라는 글귀가 황사바람에 섞여 나부낀다.

민원을 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환경친화적인 도시, 아늑하고 살기 편안한 도시를 만든다지만 그 이론을 믿거나 수긍하는 주민들은 없다.

보상금이 형편없어 어디엔가 새 삶터를 마련할 수도 없다며 농부들은 한숨짓는다.

''드림랜드''라는 정부안이 분홍빛 꿈처럼 발표되고, 여기에 놀란 농민들이 ''수용권 철회만이 살 길''이라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황사바람만큼이나 답답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농촌을 살기좋은 신도시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지도 좋지만,과연 화성군 동탄면이 일방적 수용령으로 환경친화적인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 같게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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