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은 ''숙련된 무능력자''를 대량 배출하는 체제란 지적이 있다.

여기에 덧붙여 경기 출신들을 ''머리는 뛰어나되 상식이 없는 전문가들''이라 혹평하는 사례도 있다.

땅의 성격이 금과 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분명하게 선을 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풍수적 설명이 가능은 하다.

하지만 풍수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강조하다시피 땅보다 오히려 사람이다.

오랜만에 찾은 경기 교정은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본관,교장 관사,강당,심지어는 음악실까지 그대로여서 자못 감회가 깊다.

다만 교정 동남쪽에 ''김옥균 집터''라는 조그만 비석과 동쪽에 1981년 옮겨왔다는 종친부의 5칸 팔작지붕 한옥이 낯설 뿐이다.

오래 전 일인데(1993년 말) 주간조선에 "경기고-서울대 동문 ''트로이카 스타''"란 기사가 난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으며 나 스스로는 실소와 함께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서울공대 이면우 교수,만화가 이원복 교수와 함께 나도 끼여 있었던 것은 그저 재미일 뿐이었지만 그 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 세 사람이 일차 상견례도 가진 바 없었고 서로 이름만 알고 있는게 고작이었다"는 부분이 그 중 하나다.

왜 경기고 출신이라면 서로 알고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지금까지 동창회에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

그 분들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 대목.

"경기고-서울대 출신들이 조직 속에서 안정된 지위를 추구하고 있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데 반해,이들은 조직 속에서 모험을 시도하거나 조직 밖으로 뛰어나옴으로써 ''이단''적인 스타의 기질을 발휘하고 있다.경기고 동문의 평균적인 입장에서는 약간 얼토당토 않은 경기고 3인방인 셈이다"

기자가 나를 "고집과 여린 심성의 선비형"이라 평했던데 그것이 칭찬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경기고 터는 고집은 모르겠지만 결코 여린 성격은 아니다.

물론 기자는 이면우 교수를 "형식 싫어하고 배포 큰 보스형"으로,이원복 교수를 "영민하고 논리적인 천재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경기고 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는 하다.

다만 여리다는 지적은 내 개인적인 평가에는 아주 잘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땅의 기운과는 거리가 먼 지적이다.

선 생각나는 역사적 인물은 김옥균이다.

그는 충청도 아산 출생이지만 어려서는 강릉에서 거주하였고 16세에 서울로 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일본이었다.

김옥균은 자기가 직접 일본에 가보기 이전에 이미 이동인,김기수,김홍집,어윤중 등을 통하여 신흥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박규수,유대치,오경석 등 여타 개화파들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결국 그는 우리나라의 첫번째 유혈 쿠데타라 할 수 있는 갑신정변의 중심에 서게 되고 결국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 척신 거두들을 참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상해에서 조선 정부의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고 만다.

그의 일생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성정이 화급하고 혁신적이며 때로는 무모하기까지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살았던 곳이 옛 경기고등학교 운동장이다.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가회동-화동-청운동은 거의 이어진 마을인데 가회동에서 청운동으로 넘어가는 막바지 가회동 1번지에 취운정이란 정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곳은 북악산 동쪽의 한 지맥으로 경승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 지세가 풍수상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 오르는 형상(靑鶴登空形 또는 靑鶴飛翔形)의 길지이기 때문에 산 아래에는 장사가 많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가까운 재동에는 장사가 많이 나서 재동8장사(齋洞八壯士)란 속칭이 통용될 정도였다고 한다.

부근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 성삼문의 집터도 있었다고 하니 그 지기(地氣)가 어떠한지를 가늠케 하는 중요 단서랄 수 있을 것이다.

북악과 인왕이 한눈에 잡히고 눈을 돌리면 남산이 발 아래 깔린다.

가히 서울의 특이한 명당임에 틀림없다.

지금의 정독도서관 뒤편 언덕배기에는 고불 맹사성이 살았기 때문에 맹현(孟峴)으로 불렸는데,청백리에 녹선되고 효자 정문을 받은 조선 초의 명 재상이다.

그에 관해서 나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의 고택은 현재 아산시 배방면에 있는 행단(杏壇)인데 맹 정승이 직접 심은 6백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본래 이 터는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그가 개성으로 옮겨 가면서 맹사성의 할아버지인 맹유에게 물려주었다.

이 집에 자리잡은 뒤 맹사성의 어머니이자 맹유의 며느리가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

이에 맹유는 당시 개성에서 과거준비를 하던 아들 맹희도에게 부친이 위독하다는 거짓 편지를 보내어 불러들인 뒤 아이를 갖게 하니 이때 태어난 아기가 바로 고불 맹사성이란 얘기가 전설처럼 이 고장에 남아 떠돈다.

게다가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나같은 범인(凡人)은 혼란을 일으키는데,어떻게 최영 장군이 자신이 살던 집을 내 줄 정도로 자기 할아버지와 교유하였고 자기 아버지는 최영의 친구였으며 더구나 자신은 그의 손녀 사위였던 사람이 바로 고불이란 점 때문이다.

그런데 최영 장군은 목숨을 바쳐 고려를 지키려 하였고 맹사성은 그런 처지에서 최영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랄 수 있는 조선 왕조의 재상 반열까지 오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참고로 그는 고려 우왕 때 장원을 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기러기와 고니(鴻鵠)의 그 큰 뜻을 나같은 소인배가 어찌 알 수 있으랴만 사람 살아가는 도리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런 생각도 든다.

즉 화동의 지명 유래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서로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궁중에 화초와 과일 등을 공급하던 장원서가 있어 꽃을 길렀기 때문에 화동(花洞)이 되었다는 것이고,또 다른 하나는 장원서의 북동쪽에 군기시의 예하 부서로서 화약고를 관리하던 화기도감이 있어 화기동(火器洞)이 되고 이것이 음전하여 화개동-화동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꽃과 화약이라,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명분은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실속은 불꽃을 간직한 이중성의 땅 성격이란 말일까? 나 자신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며 심각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 덕택에 풍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꽃과 화약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땅이란 생각도 없지는 않다.

혹은 앞서 어느 기자가 지적한대로 고집은 있으나 심약한 성격이 그런 식으로 지명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예속과 창의성,조직에의 순응과 언젠가는 지배하겠다는 욕망.경기 출신들에게만 있는 속성은 아니겠지만 그게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이 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가지만 첨가하자.위의 글에서 혹 경기고를 폄하하는 내용이 있었다면 동문들의 꾸중을 달게 받겠다.

다만 나는 지금 경기를 매우 사랑한다는 점은 분명히 밝혀둔다.

한국경제신문사 객원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