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연구기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KDI(한국개발연구원)의 원장을 공개채용한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연구기관들의 원장들도 공채 과정을 거쳐 임명되어 왔지만, 아무도 그것이 진정한 공채라고 믿지는 않았다.

형식은 공채이지만,실제로는 정부에서 사전에 점찍어 놓은 사람이 이사들에게 통보되고 이사회에서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선임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관례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들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국책연구기관들을 실질적인 산하단체로 활용하려고 했고, 또 연구기관들은 정부당국의 ''말을 잘 듣는'' 대가로 필요한 예산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현 정부들어 연구기관들의 소속과 지배구조가 모양은 크게 바뀌었지만, 실제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현재의 제도가 ''개악''이라는 평가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학자들과 관료들 중에는 제도개혁이 모든 개혁의 핵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문제의 본질은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운영과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도 그렇고, 지방자치제도 그렇고, 시장경제도 그렇고, 구조조정도 그렇다.

모든 것이 제도상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제대로 기능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운영상의 문제점에 그 원인이 있다.

세종대왕 시절의 ''집현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KDI는 활용여하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이다.

따라서 KDI의 원장 공채를 책임지고 있는 분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첫째, KDI는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세계 유명대학이나 연구기관들의 저명한 학자들이 빈번한 내왕을 하고 있다.

때문에 KDI의 원장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국의 석학들이 사석에서 KDI 원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진땀이 난 적이 없지 않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KDI 원장은 정부에서 쓰기 편하고, 또 당국과 호흡을 잘 맞추는 데에만 치중해 선발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일단 학문적 기반과 실적을 갖춘 학계출신을 기본으로 하되, 연구기관 근무경력이 있는 것이 좋다.

학문적으로 세계적인 석학들과 현안 사항들에 관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인품면에서도 명실상부 국내최고의 엘리트로 구성된 박사급 연구원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세속적으로 너무 발 빠르고 재주있는 사람보다 원칙을 존중하며 때로는 개인적인 손해를 보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

관료들의 편견과 수박 겉핥기식의 얕은 경제학 지식 때문에 정부의 정책방향이 옳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자들은 자신의 입신과 출세를 위해 항상 자신들의 기존 정책을 홍보해줄 것을 요구한다.

IMF 위기가 터지던 해의 연초에 당시 KDI 원장이던 필자가 ''우리경제를 파국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대폭적인 원화절하와 금리인하밖에 없다''고 건의했다가 재경부 장관한테 사퇴압력을 받았던 적이 있다.

말로는 항상 ''국가경제''를 앞세우지만, 행동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경제관료들을 견제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사람을 원장으로 뽑아야 KDI가 그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KDI 원장의 공채를 계기로 다른 모든 국책연구기관들의 원장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공채다운 공채과정을 거침으로써 우리 경제위기 해소의 실마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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