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부유한 직물상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루이 르노는 공부 보다는 기계를 다루는 일에 천부적인 소질을 나타냈다.

13세가 되던 1890년 당시 전유럽을 놀라게 했던 세르플레의 자동차를 타본 그는 자동차의 매력에 빠져 학교 공부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14살에 그는 중고 파나르 르바샤르 엔진을 구해 분해 조립에 들어간다.

1898년 루이는 군 제대와 함께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드디옹-부롱 자동차회사에서 3륜 자동차 한대를 사다가 이것을 개조한다.

루이 1호차로 불려진 이 개조차는 2백70cc,1.75마력에 32km/h의 최고속도를 내는 2인승 차로,당시 벨트나 자전거 체인으로 엔진의 구동력을 뒷바퀴에 전달해 움직인 것에 반해 프로펠러 샤프트와 디프렌셜 기어를 통해 뒷바퀴를 구동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오늘날 자동차가 가지는 구동장치의 시조가 되었다.

완성된 그의 1호차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다음 해인 1899년 루이는 형인 페르낭과 마르셀을 설득해 본격적으로 자동차회사(The Societe Renault Freres.르노형제들)를 설립,같은 해에 열린 파리 산업박람회에 르노 1호차를 출품해 60대를 주문 받는다.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을 같이 하게 된 르노 형제는 자동차 경주에서의 좋은 성적이 곧 판매증가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하고 국내외 경주에 가능한 많이 참가해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1903년 파리-마드리드 경주에서 불행하게도 마르셀이 사고로 죽게 되고 같이 참가했던 루이는 마르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경기 도중 르노팀을 모두 철수시키고 파리로 돌아왔다.

형의 죽음을 경험한 르노 형제는 이후 자동차 경주를 포기하고 승용차 개발에 전력을 모았다.

1905년 60km/h의 최고속도를 내는 새로운 모델 AG를 선보였다.

특히 4인승 쿠페형은 파리와 영국 등 유럽의 거리를 누비는 택시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페르낭도 1909년 자동차 경주에서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루이 혼자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프랑스에서는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인한 경기 위축으로 소형차 수요가 늘어났다.

르노에서 개발한 9백50cc 소형 르노 6CV는 1927년 사하라 사막 횡단 성공에 힘입어 인기를 끌게 된다.

1930년대 초에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여 현대화의 기반을 갖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루이는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공장의 유지를 위해 독일군에 공급할 트럭을 생산하는 등 독일군에 협조했다.

1944년에 파리가 독일점령에서 해방되자 루이는 전범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풀려났으나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하였다.

루이의 사망 이후 1945년에 프랑스 정부는 르노를 국유화시켰다.

르노가 국유화되긴 했지만 1946년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투옥되어 있던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디자인한 소형차 르노 4CV와 후속모델인 도핀느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르노를 프랑스 제일의 자동차회사로 발돋움시켰다.

이후 르노는 1970년대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과 일본 차의 공세 속에서도 꾸준히 첨단기술의 자동차를 만들어 오고 있다.

또 1960년대 후반부터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포츠카를 만들어 랠리 그랑프리 등 국제 레이스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손을래 수입차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