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5대 국회의원총선 당시 안기부가 집권당후보의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건이 여야간의 첨예한 정치문제가 되고 있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안기부가 재경부 예비비, 안기부예산 등 확정된 국가예산 1천1백57억원을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에 건네주었고,그 돈은 이 당의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후보자 1백80여명에게 몇천만원에서 십수억원에 이르기까지 분배됐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통치자금과 비자금에 얽힌 비화(秘話)가 무수하게 존재한다.

이런 것은 정부가 필요할 때마다 사건화해 수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 이어지는 여야간의 진흙탕 공박이 사안의 본말(本末)을 흐려 놓기 때문에 미욱한 국민은 난무하는 루머속에서나마 사건의 진의를 캐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므로 사건자체가 갖는 심각성보다,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된 배경과 그 정치적 함의(含意)에 더 관심을 갖는다.

사건의 본질은 뒤로 하고 ''왜 지금 터졌는가, 누가 당할 것인가, 칼자루 쥔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인가'' 따위가 화제가 되게 마련이다.

이런 사건은 또한 많은 사람이 예상한 대로 정치적 흥정 속에 흐지부지 종결되기 일쑤여서 그 처리과정을 통해 국민의 불신과 비슷한 사건이 재생산될 소지만 확대시킨다.

이번에 터진 안기부사건이 검찰 발표가 사실이라면 그런 사건중에서도 ''후안무치의 극치''를 이룬다.

그 죄질과 처리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타락할대로 타락한 우리 공적(公的)사회의 얼굴을 본다.

첫째, 국가예산을 자기 패거리의 선거비용으로 나누어 써먹었다.

문명세계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경악할 일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이 도대체 어떤 머리를 가졌길래 국민의 예산을 자기당 후보의 표 얻는데 나누어 쓸 발상을 했을까.

둘째, 대한민국 입법부의 3분의 2에 이르는 1백80여명이 이 돈을 받아 썼다.

그 나머지에게는 단지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거나,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알았든 몰랐든 당시 여당의원 전원이 범죄자가 된 것이다.

전부터 많은 국민이 회의하던 바이지만 민주주의의 구색을 맞추자고 이런 국회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

셋째, 당시 법정선거비용이 1억원 미만이었는데 그 몇배의 돈을 선거비용하라고 나누어 주고 받아 썼다.

국민이 지켜야 할 법을 만드는 입법부의원이 저희가 만든 선거법을 스스로 위반할 것을 기약하고 나눠 받고 쓴 것이다.

차라리 그 돈을 가사와 유흥에 써버린 의원이 있다면 가히 상 줄 일이다.

넷째, 일부의 주장대로 이런 사실을 이미 몇달전부터 알고 꼬불쳐 놓았다가 누구를 흠집 내거나 물타기 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정략이용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더 악질적인 범죄가 된다.

그것은 이렇게 심각한 사건을 호도(糊塗)한 죄에 더하여 ''불륜사건을 알리겠다''며 유부녀를 등쳐먹는 공갈범에 해당하는 파렴치의 범죄를 붙인 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정치지도자들로부터 ''국민을 하늘같이 두려워하여… 운운'' 하는 말을 지치도록 들어 왔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국민을 무섭게 알겠는가.

국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부실채권을 인수하게 하여 국민(시장)이 선택한 구조조정과정을 무산시키는 행위는 국민을 두려워하는 행위인가.

국민이 싫다고 적게 뽑아준 정당에 의원을 꿔주어 기어이 교섭단체를 만들어 주는 것은 국민을 무서워하는 자들의 소행인가.

벼슬을 탐하는 제자(子遲)가 이것저것 알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은 자연히 그를 따르고, 위에 있는 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은 자연히 참된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윗사람이 이리 하면 사방의 백성이 자식을 등에 업고 그를 그리워하여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몸소 농사 짓고 채소 가꾸는 일까지 왜 하는가"

차기 정권을 노리는 자든, 정권 재창출을 도모하는 자든, 일시의 소탐(小耽)을 버리고 정도(正道)를 가야 할 것이다.

2천5백년 전 성인의 말씀이지만 지금이라도 성심하여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향후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