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이라 하면 보통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부터 그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까지를 이야기한다.

물론 요즘의 세밑은 양력을 기준으로 하는데다 요즘처럼 제철 식품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에는 시절 지난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네 세밑 음식 얘기는 동지부터 시작된다.

동지가 지나면서 짧은 낮이 세력을 회복하여 새해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므로 팥죽 속에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나이 수만큼 넣어 먹는 풍습이 있어 "아세(亞歲)"또는 "작은 설"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맘때면 동네 구석에서 "뻥!"하는 소리와 함께 뻥튀기 장사가 진을 치고 앉아 밥풀을 튀겨내고,집에서 곤 엿으로 튀겨낸 쌀을 뭉쳐 강정을 만들기도 했다.

겨울 음식으로 팥 앙금을 내려 찹쌀에 싸서 살짝 쪄내는 찹쌀떡이나 귀여운 손자가 오면 다락문을 열고 항아리에서 한 알씩 꺼내주는 할머니의 홍시도 겨울철 요긴한 간식 중의 하나.

해가 기울어 섣달 그믐이 되면 집 안팎을 청소하고,새해맞이 준비를 한 후 저녁에는 남겨두었던 갖은 나물을 넣어 밥을 비벼 식사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새해 아침에 떡국을 먹기 위함이기도 하거니와 한 해의 남은 앙금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이 한 해를 시작하자는 각오도 들어 있는 것.

저녁을 먹은 후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는데, 이때 어린아이들에게는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며 밤을 밝히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섣달 그믐 저녁에 먹는 비빔밥은 말 그대로 밥에 갖은 재료를 얹어 비벼 먹는 음식이다.

한자로 "어지러울 골(汨)"과 "비빔밥 동(董)"을 써서 "골동반"이라 부르기도 한다.

워낙 남은 음식으로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한 음식이다 보니 어떤 재료를 넣더라도 웬만큼 맛이 나고, 그럴 듯한 이름이 붙는다.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나물 비빔밥, 산채 비빔밥, 닭고기 비빔밥 등 이름이 붙게 마련이고,지방마다 얹는 재료가 달라지면서 다시 전주 비빔밥, 진주 비빔밥, 통영 비빔밥 등의 이름이 붙는다.

우리 나라의 웬만한 관광지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산채 비빔밥이고,나물 비빔밥이지만,나물 하나 하나에 간이 배어 있지 않으면 제 맛을 내기 힘든 게 또 이 산채 비빔밥이다.

인사동의 "산촌"(02-735-0312),한남동의 "풀향기"(02-793-6878 등은 갖은 나물을 얹은 산채 비빔밥으로 유명한 집들이다.

비빔밥 중 가장 유명한 전주 비빔밥은 밥 이외에 갖은 나물과 고기 등 20여 가지가 들어가는데 육수로 밥을 짓고 뜸들일 때 콩나물을 넣어 같이 익힌 후 묵은 간장과 고추장, 참기름 등을 넣고 맨 위에 육회와 제철 야채를 얹는가 하면,청포묵을 살짝 데쳐 얹고 색색 지단을 뿌려 모양을 내기도 한다.

전라도가 전주 비빔밥이라면 경상도는 진주 비빔밥.

고기 대신 바지락 살을 곱게 다져서 볶아 밥 위에 놓고,익힌 야채들을 함께 올려 만든다.

전주 비빔밥이나 진주 비빔밥 등 고유의 비빔밥이 유기나 도기에 담겨 나오는 반면 요즘은 돌솥 비빔밥이라 해서 처음부터 돌솥에 밥을 지은 후 위에 갖은 나물을 얹고 고추장을 곁들이는 음식이 더 대중적이다.

돌솥 비빔밥은 뜨거운 밥에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고 바닥에 눌은 누룽지를 긁어먹거나 물을 부어 불려 누룽밥으로 만들어 먹는 재미도 있는 일품요리.

청담동의 "토담골"(02-548-5114)에서 내는 돌솥 비빔밥이나 인사동 "조금"(02-725-8400)에서 내는 버섯 솥밥도 이 돌솥을 이용하는 요리.

돌솥 비빔밥도 나물만 얹거나 버섯만 얹는 등 재료를 달리 하여 맛을 내는데 인삼 대추 밤 등을 넣어 보양식으로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다.

비빔밥의 재료는 무궁무진하고 그만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

밥 위에 한두 가지 재료만 얹으면 완성되는 스피드 요리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재료 하나 하나를 손끝으로 조물조물 주물러서 간이 배이게 하지 않으면 그만큼 맛없는 게 또 이 비빔밥이다.

지난 한 해의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채워 왔다면 요즘, 끊이지 않는 안부 전화와 수북히 쌓이는 연하장으로 살맛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신혜연 월간데코피가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