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와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내며 독립외교 활동을 벌였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1881∼1950)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최근 선정했다.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친의 유배,모친의 사망으로 네살 때 미국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에게 입양돼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구세학당을 졸업한 뒤 독립신문사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서재필 선생의 영향을 받았으며 1897년 미국으로 유학,로녹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경신학교와 YMCA학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 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동제사에 가입했으며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 대표들 모임인 ''파리강화회의''에 국민대표로 파견돼 독립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선생은 같은 해 4월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주 파리대표 위원으로 임명됐으며,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을 위한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한국독립운동의 적극적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1930년 초 민족통일전선 운동을 전개했으며 중·일전쟁이후 민족혁명당 대표로 활동하다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됐다.

선생은 광복후 임정요인으로 귀국,좌우합작 운동에 힘썼으며 민족분단을 막고자 김구(金九)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나서는 등 심혈을 기울이다 6·25전쟁중에 납북돼 50년 12월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지난 89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