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풍수는 다양한 위상을 갖고 있다.

풍수가 후대에 복을 주기 위해 명당을 찾아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근래엔 독특한 사상성을 내포한 일종의 학문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추세다.

어떻든 풍수에는 장구한 세월동안 땅의 질서와 인간의 논리 사이에서 벌어져온 갈등을 풀어내려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 있다.

풍수를 단순한 "명당찾기"에서 "인간의 삶과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풍수지리연구가인 최창조 교수가 서울.수도권 일원의 주요지역이나 건물을 찾아가 풍수적으로 해석하고, 명당 아닌 곳을 명당으로 만드는 비보(裨補)의 방법을 제시하는 기획 "최창조의 풍수산책"을 매주 목요일자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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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그때 나는 북한 땅에 있었다.

떠날 때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이었지만 그 해 말 돌아왔을 때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였다.

김대중씨의 당선 사실을 들은 것은 1997년 12월19일 평양 고려호텔 로비에서였다.

당시 남한은 소위 IMF 사태를 맞아 세기말의 보릿고개를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북한은 식량난으로 파탄을 예고하던 시기였고, 남쪽은 외화를 꾸러다니느라 넋이 나갔고 북쪽은 양식을 구걸하러 다니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한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북쪽 사람들로부터 예상되던 적대감이나 거부감을 받지 않고 평범한 대접을 받았다는 정도일까.

"너의 불행이 나의 위로"라는 억하심정에서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거지 너도 거지, 우리는 거지"라는 동질감 속에 한 겨레의 일체감을 맛보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00년 12월, 왠일인가?

또 다시 IMF 사태보다 더 악화된 경제 위기설이 실감있게 다가들고 있다.

처음은 멋도 모르고 당했지만 이제는 "금모으기 운동"식으로 고통을 감수하려는 자세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어찌보면 자포자기의 상태가 될는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들린다.

독일에 참패를 당한 프랑스의 영웅 드골은 "칼은 부러졌다. 그러나 부러진 칼의 한 조각을 가지고 끝까지 싸우겠다"며 국민을 독려했고 결국 그는 개선장군이 되었다.

첫번째 시련을 잘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훗날 국민투표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물론 그는 권력에 미련을 두고 졸렬한 작태를 드러내는 정상배들과는 달리 의연하고 깨끗하게 최고의 자리를 떠났다.

두번째 시련은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실패하여 좌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주식 시장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도 모른는 경제 문외한이 경제 문제로 글 문을 트는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경제가 삶의 한 존재 양태이듯, 환경으로 통칭되는 자연 파괴의 문제 또한 삶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 중요성에서 보자면 환경문제는 경제문제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한 백면서생에 불과한 풍수쟁이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경제로 풀어내기 시작하는 변명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시인 이동순은 그의 "즐거운 일"이란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래 묵은 산길에/키큰 억새와 가시덤불이 잔뜩 우겨져/인간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즐거운 일이다. 바람에 넘어진 고목이/도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어서/그대로 꼼짝달싹 못하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은/즐거운 일이다. 묶인 개를 풀어놓고/늑대처럼 등털을 바람에 나부끼며 온몸으로 질주하는/개의 감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즐거운 일이다"

인간의 흔적이, 자동차의 폐해가 얼마나 컸으면 이런 시인의 절규가 나오겠는가.

바람을 가르며 뛰어가는 늑대도 아닌 개의 질주를 바라보며 자유를 느끼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는가.

나는 바람과 물의 길(風水之道)을 따라 자연이건 경제건 정치건 문화건 세상살이를 살피며 그것을 풍수의 눈으로 보고자 한다.

이제 그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내가 생각하는 풍수란 무엇인가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람이 살다보면 인생의 전환점이란 것을 겪게 된다고 한다.

혹은 자신의 갈 길을 암시하는 중요한 사건을 만나게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유별난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무슨 남다른 경험이 있어서 풍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저 어릴 때면 누구나 경험하던 그대로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는 시골 풍정 속에 파묻혔을 때 안정을 얻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나를 좀 특이한 아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산과 들판에 대한 관심은 풍수의 출발이다.

어찌 되었거나 나는 지금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풍수를 공부한다고 하기가 썩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다.

나이 쉰이 넘어 한 때는 대학에서 풍수를 가르치고, 풍수 전문가라는 과분한 호칭까지 일부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는 처지에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인들이 풍수를 상당 부분 오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풍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그것을 통하여 덕 좀 보자는 인식일 것이다.

즉 "부모님 산소자리 하나 잘 골라 써서 그 음덕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땅을 대상으로 한 술법" 정도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풍수에 대한 관념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더욱 문제스러운 것은 그런 속마음조차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거짓을 내뱉는다는 것이다.

하기야 사람인 이상 어떻게 드러내 놓고 부모님 유골 덕 좀 보겠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논거는 오직 한가지,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도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 돌아가신 다음에나 잘 해드리고 싶어서"라고 변명을 한다.

죽어 땅에 묻혀 백골만 남은 사람이 무슨 효도를 받을 수 있겠는가?

뻔한 거짓말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정성으로 부모님을 모셨다면 그런 구차한 말장난은 필요치 않을 것 아닌가.

음택(묘지)풍수가 요구하는 효도의 요체는 살아계실 때이지 돌아가신 뒤가 아니다.

정말로 생전에 효성을 다 한 사람은 하늘이 그 효심을 알아, 명당 길지를 내려준다는 가르침을 따르면 될 일이다.

적선과 적덕을 하면 시체를 개굴창에 내던져도 그곳이 바로 명당이란 말이 풍수 고전에도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풍수의 본령이 죽은 사람의 유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의 마음 가짐에 있는 것이라고, 즉 풍수는 땅에 관한 지리학적 측면 이외에 사람에 관한 인문학적 측면이 보다 강하다고 주장해 본들 현대인들이 귀담아 듣지를 않으니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겠는가.

나 자신도 처음 풍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음택풍수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연히 발복풍수와 관련되는 것으로, 소위 근심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릴 수 있는 명당 찾기에서부터 풍수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이에 상당히 많은 풍수관의 변화를 겪었다.

어떤 과정을 통하였는지를 자세히 언급할 계제는 아니고, 다만 지금의 생각만을 간추리자면 대략 이렇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명당을 찾아나서는 일보다 명당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젊은 제자들은 그것을 간략히 표현하여 "전 국토의 명당화"라 부르지만, 여하튼 명당찾기에서 명당 만들기로 전환한 것은 분명하다.

< 한국경제신문사 객원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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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조 교수 약력 ]

1949년 서울 출생
1974년 서울대 문리대 지리학 석사
1979-1981년 청주사범대 전임강사
1981-1988년 전북대 지리학과 교수
1988-1992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현재 경산대 객원교수, 지리산살리기 국민운동 공동대표

<> 저서 =한국의 풍수사상,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한국의 풍수지리, 한국의 자생풍수, 땅의 눈물 땅의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