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자우환(識字憂患).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다.

때로 우리는 ''아예 교육을 받지 않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뱃속 편할까''하고 생각하는 수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 돌아가는 꼴을 보면,나 자신도 내 공부가 근심 정도만 높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느 사회를 보거나 지식인이 너무 많으면 그야말로 걱정도 많은 것이 분명하다.

미국 유학 시절에 나는 프랑스혁명(1789년)의 주요 원인으로 지식층의 증가를 지적한 논문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전부터 나는 신라 말기 육두품(六頭品)의 등장과 고려말 유학자들의 성장이 신라와 고려 멸망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조금만 아는 이라면 다 알테지만,신라 말기엔 당나라에 유학하는 사람도 많았고,그들은 신라에서 받기 어려웠을 고급지식을 수용해 귀국했다.

고려 말 역시 원나라에 유학할 기회도 많았고,또 유교가 점차 자리잡으면서 많은 유학자들이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신라말 육두품이나, 고려말 유학자들이나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사회에서 활용할 기회란 매우 적었다.

그때에는 그들을 소화할 자리가 관리뿐이었는데 그 수가 적은데다,자리를 얻어도 기득권층이 땅(당시의 봉급)을 모두 차지해서 신진에겐 줄 것이 없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셈이다.

왕건과 이성계는 이들 신진 지식층의 불만을 배경으로 새 나라를 세운 셈이다.

며칠 전 서울대 대학원 지원자가 사상최저로 떨어졌다는 소식은 그런 위기 의식을 일깨워 준다.

실상은 한국의 모든 대학원이 마찬가지로 지원자 미달이다.

가장 실용적이어서 언제나 지원자가 많았던 공학분야조차 정원 채우기가 어려운 모양이니,누가 보아도 ''쓸모없는'' 인문학분야나 기초과학에 지원자가 부족한 것이야 당연하다.

기초학문이라면 대학이나 연구소가 전부인 셈인데 그런 곳은 이미 ''만원''이다.

전국 대학의 강의는 수많은 시간강사들이 맡고 있다.

그런데 그 강사로 나가는 박사들이 한달에 몇십만원을 벌기 위해 기차 고속버스 전철로 지방·서울을 불문하고 매주 한번씩 종일 ''거리를 헤매는''상황이다.

그 수입으로 박사들은 처자식까지 먹여살려야 한다.

해마다 2천여명의 박사가 쏟아져 나온다는데,그들이 취직할 대학이나 연구기관 자리는 극히 적다.

그러니 대학원 정원이 차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게다가 오늘의 사회분위기는 실용 중심이다.

그리고 실용은 항상 돈되는 공부를 말한다.

더구나 ''신지식인''이란 이상한 말로 전통적인 학문을 폄시(貶視)하고,새로운 분야만을 우상화하는 세태이고 보면….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사람들은 공부를 하다 공부가 좋아져 공부에 빠지는 수가 많다.

기초학문은 그래서 하게 된다.

응용적이고 실용적이지 않지만,공부 그 자체가 좋아서 매달리는 것이 기초학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막대한 돈을 들여 벌이고 있는 ''두뇌한국(BK)-21''만 보아도 기초학문은 제쳐두고 돈되는 연구만 하라는 투가 뚜렷하다.

이래서야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은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분야에 사람이 아주 없어질 수가 있나.

그렇지 않다.

사람수야 줄겠지만,여전히 배고픈 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또는 기초과학에 목을 매고 달려들 것이고,그들의 불만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인문학의 폄시는 지식인의 자조와 분노로 이어지고,그것은 우리 사회의 불안으로 직결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얼핏 생각하면,깊어만 가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돈버는 재주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교육이며,그런 공부가 가장 훌륭한 학문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실용적일 듯한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은 기초학문을 무시하기는 커녕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자랑하고 있다.

노벨과학상은 기초과학에만 주어진다.

우리가 이렇게 기초학문을 무시한채 실용으로만 달려가다가는 노벨과학상 받는 길이 더욱 멀어져 갈지도 모른다.

기초학문을 공부해도 박사쯤 받으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