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그랑프리 대회가 처음 시작된 1906년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쇼이치로 혼다는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철과 가까워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5세의 나이에 도쿄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에 사환으로 들어가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쇼이치로의 시련은 1938년 작은 정비소를 차려 자동차수리를 하면서 피스톤 링과 같은 부품을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요타에 판다는 계획을 갖고 시작한 쇼이치로는 밤낮으로 개발에 열중해 피스톤 링을 개발해냈지만 도요타의 기준에는 거리가 멀어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쇼이치로는 2년에 걸친 연구개발끝에 결국 도요타와 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 당시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일본에서 도요타에게 공급할 부품을 만들 공장을 설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쇼이치로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직접 개발,공장을 세웠다.

2차대전이 끝나고 오일파동의 여파로 정부는 자전거 사용을 권장하게 되고 쇼이치로는 자전거용 보조동력을 만들기 시작한다.

보조동력이 장착된 자전거는 불티나게 팔렸지만 재료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생산이 중단된다.

이번에도 쇼이치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1만8천개의 자전거 점포에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5천명이 답장을 보내왔고 그 돈으로 다시 생산에 들어가 마침내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유럽과 미국에도 수출을 하기 시작한다.

1970년 또 한번의 오일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형자동차가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소형엔진 제작에 자신이 있던 쇼이치로는 곧 기존의 소형차보다 더 작은 차를 만들어 또 한번의 성공을 맛본다.

쇼이치로 혼다는 계속되는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술개발이라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오늘날의 혼다를 세웠다.

혼다는 일본업체들이 외국차 메이커와 합작으로 차를 생산할 때도 유독 독자기술 개발을 고집,모터사이클 분야에서 착실히 성장했고 이때 축적된 기술은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접목됐다.

이 때문에 36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이룬 혼다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계에서 2백여만대의 차를 생산,판매해 매출에서 세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혼다의 오늘은 결국 포기하지 않는 기술제일주의 정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을래 수입차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