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통령선거의 혼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 망한다''는 소리가 나올 법하지만 미국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미국인들의 이같은 여유를 바라보는 입장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정치가 아무리 흔들려도 경제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기업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미국식 정경분리(政經分離)''가 미국인들 특유의 여유 아닌 여유를 받쳐주고 있다.

기실 미국경제의 최장기 호황을 이끌어내고 있는 FRB와 앨런 그린스펀 의장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는 믿기 어려울 만큼 크다.

그 정도가 지나쳐 그린스펀에 대한 과신은 이제 그에 대한 ''우상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뉴스위크 최신호(11월27일자)의 촌평이다.

워터게이트사건을 파헤친 밥 우드워드 기자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그린스펀을 ''미국경제라는 대형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거장(巨匠,Maestro)''으로 묘사했다.

포천지는 미국동전에 새겨진 문구 ''In God We Trust''를 그대로 인용, "우리는 그린스펀을 (신처럼) 믿는다"고 했다.

타임지 또한 그린스펀과 전(前)재무장관인 로버트 루빈,그리고 현(現)재무장관인 래리 서머스 3사람을 겉표지에 그려놓고 ''세계를 구해낸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그린스펀의 실상도 재미있다.

그린스펀은 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1987년 FRB의장이 된지 수개월도 안된 시점에 주식시장이 하루만에 20%이상 떨어지는 ''검은 월요일 (Black Monday)''을 경험하기도 했다는 게 뉴스위크의 지적이다.

FRB와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금리정책 또한 ''만능 요술지팡이''일 수는 없다.

90년대 초,그와 FRB가 취한 저금리정책(연 3%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경제가 90년과 91년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상당기간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은 FRB가 ''만능집단''이 아니라는 결정적 근거라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요즈음 ''정치가 경제를 죽이는'' 한국을 미국과 비교해 보면 정치와 경제가 왜 분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분명하고 쉽게 찾을 수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가서도 싱가포르 고촉통 총리와 야간 조명 속에서 골프를 즐겼다.

"경제는 그린스펀이 맡고 있으니 나는 그저 우방국 정상들과 골프나 즐긴다"는 식이다.

미국사람들 또한 그 누구도 이를 두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

어쩌면 클린턴 대통령의 골프치는 모습이야말로 "모든 것은 그린스펀과 시장자율에 맡긴다"는 클린턴식 자유시장경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역설적 단면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도 시장경제를 외쳐댄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제2 경제위기''에 몰리고 있다.

바쁘기 이를데 없는 장관 기업인 가릴 것 없이 ''대통령 한 말씀''에 신경을 쓰느라 바쁜 청와대회의광경은 우리사회의 후진성과 ''비(非)시장경제성''을 대변하는 대표적 상징의 하나다.

우리 정부는 폐지해버렸던 경제부총리 자리까지 다시 살려놓았다.

위상이 한결 높아진 경제부총리이지만 그에게서 ''한국의 그린스펀''이라는 이미지를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 경제시스템이 안고있는 구조적 맹점이 아닐 수 없다.

"구조조정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외쳐대고 "은행과 채권단이 그 주체"라고 둘러대면서도 이 두 명제를 제대로 구현해보려는 노력은 정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경제는 내가 직접 챙기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미 골프광(狂) 클린턴과 공화당원 그린스펀이 빚어내는 진정한 ''자유 시장경제''가 강조되는 21세기에 들어서 있다.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