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준은 벤처기업가가 아니다"

한국디지탈라인 사건이 터진 후 테헤란밸리의 벤처기업가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이들은 신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도,기발한 아이디어를 상업화한 사업가도 아닌 금융 사기꾼때문에 밤을 지새며 연구개발에 힘쓰는 벤처기업인들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데 대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정현준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도 일부 벤처기업을 둘러싼 비판은 없지 않았다.

재벌의 구태를 본따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거나 기업의 핵심역량을 키우기보다 머니게임에만 몰두한다는 식의 비난이었다.

이번 "정현준 사건"을 벤처기업들은 자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설득력을 더 얻고 있다.


◆사업보단 머니게임에 몰두=기술 개발에 몰두하거나 핵심역량을 키우려 하기 보다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머니게임에 탐닉하는 회사들이 문제다.

이들은 기업 내실을 다지기 보다는 기업 가치를 수십배씩 부풀려 높은 배율로 투자받을 궁리를 하는 데 급급하다.

회사를 과대포장하기 위해 벤처기업이 활용하는 단골 메뉴는 매출액 부풀리기.

코스닥에 등록한 A사는 지난98년과 99년 예상 매출액을 3백억원과 6백억원이라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실제 매출액은 연 1백억원을 밑돌았다.

곽성신 우리기술투자 사장은 "투자한 업체들을 대상으로 투자 당시 각 기업이 제시한 예상매출액과 1년뒤 실제 매출액을 비교한 결과 투자업체들의 실제 매출액은 예상치의 50%에도 못미쳤다"고 털어놨다.

코스닥 등록업체인 Y사의 L사장은 서울 강남에 개인 소유의 룸살롱을 마련해놓고 창투사·증권사 임직원,공무원 등에게 접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I창투 L사장은 "대차대조표는 커녕 월별 현금 흐름에 대한 인식도 없이 용감(?)하게 투자를 받으러 오는 이가 적지않다"며 "건실한 사업 내용을 바탕으로 투자를 받기보다 술이나 골프 접대로 투자자의 환심을 사려는 행태가 더 큰 문제"라며 씁쓸해했다.

◆재벌식 문어발 확장=증시가 활황세를 보였던 지난해말부터 올해초까지 공모를 통해 자금을 확보한 코스닥 벤처들은 네트워크 구축,벤처생태계 조성 등의 명분을 앞세워 다른 벤처에 투자했다.

코스닥증권시장에 따르면 올 상반기동안 시가총액 상위 20개 벤처기업이 타법인 출자에 쏟아부은 돈은 모두 9백37억원에 달했다.

이들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액(4백25억원)의 두배가 넘는 규모다.

재테크 차원에서 주식투자에 나섰던 몇몇 벤처 기업가는 본래 사업과는 거리가 먼 금융 엔터테인먼트 등의 분야에까지 손을 뻗쳤다.

인터넷 업체인 G사는 신용금고와 농구단을 인수했고 IT업체인 P사와 T사 역시 금융업에 진출했다.

고정석 일신창업투자 사장은 이와 관련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비관련 다각화를 추진한 벤처기업은 머니게임을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이번 사건을 통해 벤처기업인들은 진정한 기업가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부도덕한 업자,투기꾼,로비스트 등의 오명을 벗기 위해선 기업 윤리와 도덕성을 점검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장흥순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벤처인들은 정현준 사건을 자성의 기회로 삼아 벤처기업인에 대한 신뢰를 하루 빨리 되찾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진정한 벤처 기업가 정신과 기업윤리로 재무장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방실 기자 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