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공문까지 보내 ''정색을 하고'' 부실기업 판정작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은행권의 판정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금감원은 은행들이 퇴출로 인한 손실부담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기업을 ''살리는'' 쪽에 치우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권의 이같은 움직임은 회생가능한 기업과 퇴출돼야할 기업을 확실히 가려 금융시장을 조기에 안정시키겠다는 이번 판정작업의 취지와 어긋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계에서는 기업구조조정이 미완으로 끝날 경우 향후 금융시장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 은행들의 몸사리기 =이번 부실기업판정은 주채권은행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데는 익숙지 않은 모습이다.

퇴출보다는 회생쪽으로, 금융권 지원보다는 자체 노력만으로 회사가 살수 있다는 쪽으로 판정의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국민 주택 하나 신한 조흥 한미은행 등은 벌써부터 "우리 은행에서 문제가 되는 기업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은행들의 이같은 움직임은 추가부담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퇴출대상으로 분류할 경우 은행들은 이전에 빌려준 돈에 대해 충당금을 추가로 쌓거나 손실 처리해야 한다.

퇴출대상은 아니더라도 지원이 있어야 회생가능하다고 분류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출자전환 등 추가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

한마디로 문제기업에 대해서는 추가로 지원하든지 추가손실부담을 지든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은행들의 입장이다.

2차구조조정을 앞두고 최대한 은행의 자산건전성과 수익성 등의 지표를 좋게 만들어야 하는 은행들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금감원에 따르면 은행들은 △정상기업 △일시적 유동성을 겪고 있는 기업 △구조적 문제이지만 회생가능한 기업 △구조적 문제로 회생불가능한 기업 등 4단계로 분류하는 작업에서 부실징후기업을 대부분 3단계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정이 반영된 결과다.

◆ 판정 대상기업 늘어난다 =금감원의 새로운 지시에 따라 일부 은행들은 휴일에도 출근해 판정작업을 수정했다.

1백60여개 업체를 대상으로 판정작업을 벌이고 있는 한빛은행은 이번 금감원 지시에 따라 10여개 업체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은행 관계자는 "당초 심사대상기업중 15% 가량이 신용위험평가협의회에 제출될 기업으로 분류됐지만 대상기업이 좀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은행 등도 금감원 지침을 따를 경우 해당기업수가 현재보다 다소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권 전체적으로는 이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적어도 20~30개 기업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대상 기업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은행들의 몸사리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무리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감원의 지시대로 기업을 재분류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좀 더 강화된 기준으로 재분류하더라도 결국 규모가 적은 기업만 추가될 뿐"이라며 "회생및 퇴출기업을 선정하더라도 앞으로 종금사 등 다른 금융기관과 합의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난처함을 호소했다.

금융계 관계자는 "은행들이 추가손실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향후 협의과정에서 퇴출기업으로 최종 선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