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낮에도 덥지 않고 밤에도 춥지 않다.

생애의 날씨가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절이다.

끓이지도 않고 얼리지도 않으니 좀 좋은가.

정신도 몸도 상쾌하고 민첩하다.

일을 하는 계절이 따로 없다면 마땅히 독서의 계절도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계절에 상관없이 일을 하는 것처럼 계절에 상관없이 우리는 책을 읽는다.

일이 삶인 것처럼 독서도 삶이다.

그러니까 ''가을이니까 책 좀 읽자''하는 계몽은 오히려 책과 독서를 우리의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을이니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복과도 같은 계절을 맞으면 어쩐지 책방에 가서 책을 사고 싶어진다.

책상 위에 책들을 쌓아두고 뒤적거리며 작가들의 정신과 만나는 상상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설렌다.

왜? 가을이니까.

구둣가게 주인은 사람을 볼 때 구두부터,혹은 구두만 본다는 말이 있다.

신고 있는 구두 색상과 디자인,손질한 정도와 닳은 부위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과 직업 등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거의 틀리지 않는다는 말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기준이 하나 있다.

구둣가게 주인처럼,나도 읽고 있는 책과 가지고 있는 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구둣가게 주인이 그런 것처럼,내 판단도 거의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책장이 그 사람을 증거한다.

좋은 버릇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버려야 될 악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책장이 텅 비어 있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아예 책장이 없는 집이 뜻밖에 많다.

한달에 몇번씩 미장원과 술집,노래방과 당구장을 드나들면서 1년내내 책방 나들이를 한번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태어난 시대에 비해 우리의 얼굴이 예뻐지고 몸매가 날씬해졌지만,정신이 황폐해지고 부석부석해졌다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내용물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행위에 지나지않는다.

쓰레기는 아무리 요란한 포장지로 싸도 쓰레기다.

예쁘게 얼굴 가꾸고,보기 좋은 몸매 만드느라 시간 들이고 돈 들이고 정성 들이는 우리네 이웃의 가난한 책장은 낯 뜨겁다.

몸매를 부끄러워 할 게 아니라 빈 책장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전집만 잔뜩 꽂힌 책장도 믿음을 주지 않는다.

손때가 한 군데도 묻어 있지 않은 반질반질하고 매끈매끈하고 두툼한 전집들은 장식품으로 쓰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것이 아닌가.

포즈와 허명에 붙들려 사는 사람의 거짓 인생이 한눈에 보인다.

폼과 제스처와 포즈로 인생을 사는 자들은 우리를 질리게 한다.

군자인 척하는 폼과 애국자인 척하는 제스처와 고상한 척하는 포즈에 우리는 충분히 질렸다.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설득하지 못한다.

여성지 아니면 성공의 지름길 따위 처세와 치부의 테크닉에 관계된 책만 꽂혀 있는 책장도 믿음이 가지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세상이 수단으로 목적을 덮고,물질로 정신을 갈고,편리로 원칙을 대체하는 시대라 하지만,그런 책들만 꽂혀 있는 책장을 보면 어쩐지 출세를 위해 달리는 우리 사회의 천박함과 벌거벗은 욕망을 보는 것 같아 개운하지가 않다.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비타민과 칼슘과… 그런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섭취하는가? 몸의 기능이 정상인 한,그냥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으로 족하다.

우리 몸 속으로 들어간 음식은 우리 몸의 활발한 신진대사를 통해 단백질과 탄수화물과 비타민과 칼슘과… 몸이 필요로 하는 요소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읽는 책도 우리 정신의 활발한 신진대사를 거쳐 우리 인생에 유용하고 필요한 요소로 화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당장 써먹기 위한 독서만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생애의 날씨가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계절은 그러나,혹은 그래서 짧다.

좋은 만큼 짧다.

무엇을 하든 좋은 이 계절이 책을 읽기에는 왜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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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연세대 신학대학원
△장편 ''생의 이면''''식물들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