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진성호는 층계로 지하층까지 내려와 병원건물 밖으로 나갔다.

지금쯤 로비에 있을 어머니와 형과 누이를 대하기가 싫어서였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천 형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재벌과 신문쟁이들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무슨 연유로 재벌과 언론에 반감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은 10대 재벌과 언론사를 소유한 가문이고 그러한 가문의 권세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날이 신장되어 왔음을 진성호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강직한 소신을 내세우며 정치판에 입문한 정치인들도 일단 정치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은 재벌에게 고개를 숙이고 언론가문의 눈치를 보게끔 되어 있었다.

그들 가문은 재력이 뒷받침하는 조직의 힘과 마음대로 휘두르는 펜의 위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 그들이 국가를 상대로 해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IMF사태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진성호는 궁금해졌다.

국가는 분명히 투자유치 목적을 내세워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재벌의 위력을 줄이려 할 것이고,그렇게 되면 늑대를 잡으려고 범을 끌어들인 꼴이 될지도 몰랐다.

진성호는 차에 다가갔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차 뒷문을 열었다.

진성호는 차에 올라타지 않고 통화내용이 기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차에서 떨어진 지점에 가서 황무석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하는 황무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회의석상에서 논의된 사표수리 여부는 일주일 후에나 정할 일이므로 황무석을 비롯한 사장단들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 진 회장이에요.지금 통화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네,괜찮습니다"

"다름 아니라…그러니까…아내가 오늘 새벽에 운명했어요"

황무석이 갑작스런 비보에 놀랐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장례를 치러야겠는데 황 부사장님이 이 일을 좀 맡아서 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례절차는 아내 가족과 접촉해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십시오…신문에 부고는 내지 마시고요.가까운 친인척만으로 조용히 치러야겠어요"

"알겠습니다만…"

황무석이 머뭇거렸다.

"나도 영안실에 가지 않을 거예요"

"정말 나오시지 않을 겁니까?"

"예,발인날 장지에 가서 아내와 하직인사만 하겠어요.장지도 아내 가족이 정하라고 하십시오"

"회장님,회장님이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대갓집답게 모든 예절을 갖추어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황무석의 말에 진성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반대의사를 나타내기는 처음이었다.

"회장님,처갓집 어른들께 섭섭한 생각을 갖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밖에서 무슨 소문이 날지도 모르고요…"

그때서야 진성호는 황무석의 진의를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