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복원 기공식이 있었던 지난 월요일.태풍이 지난 뒤라 하늘은 파랗고 가을 바람 소슬한 이른 아침,동네 테니스코트에서 아침 이슬에 젖은 삐라를 여러 장 발견했다.

''원통하다 이 치욕,이 불행''이란 제목 밑에 ''한미행협''이라고 쓰인 쇠사슬에 묶인 한복 입은 소녀가 ''아악''하는 비명을 지르고 그 뒤에 흉악한 모습의 악한들이 ''강도''와 ''강간''을 하고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시키는 그림이 있었다.

뒷면에는 ''미군 있는 한 치욕,불행 계속된다''는 제목 아래 가슴에 털 난 미군이 한반도를 깔고 앉아서 ''한미행협''이라고 쓰인 부채를 부치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 아래 ''한미행협 개정투쟁을 미군철수투쟁으로 이어 나갑시다''라고 하면서 끝에는 ''미군철수·민족자주 시민연합''이라고 쓰여진 삐라였다.

또 ''1949.9.22 김정숙여사님 서거 51주기 2000.9.22''라는 삐라에는 ''백두산 여장군 김정숙여사님은 겨레와 함께 영생하십니다''라는 제목 아래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하여 ''조국광복 조국통일 민족번영을 위한 애국애족은 김정숙여사님의 한생입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뒷면에는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크게 ''김정일장군님은 통일의 태양''이라고 쓰고 ''조국통일은 김정숙여사님의 필생의 염원,그 염원 앞당겨 오시는 분은 김정일장군님,하나로 뭉치자,김정일장군님 주위에! 안아오자,통일의 새날을!''이라 쓰고 끝에 ''2·16회''라고 적혀 있었다.

상쾌한 아침운동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땀을 닦고 삐라를 다시 보았다.

누가 왜 어떻게 여기에다 삐라를 뿌렸을까? 북쪽 사람이, 아니면 남쪽 사람이?

북쪽 방송들은 남쪽 삐라를 인용해 남쪽의 각계각층이 김정일장군을 통일대통령으로 추앙한다고 선전한다는 뉴스도 있었고,남쪽의 어느 전직대통령과 야당총재를 ''반북·반통일세력''으로 비난하는 삐라가 신라호텔에 뿌려진 뒤라 삐라의 출처가 궁금하기만 했다.

종이나 인쇄를 보면 조잡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북쪽이 만들어 뿌렸다면 지난번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은 미군철수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과 맞지 않고,만약 남쪽에서 만들었다면 ''백두산 여장군''과 ''한생''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미군을 우리에게 치욕과 불행을 갖다준 흉악범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미군이 철수하고도 우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민족자주를 이룰 수 있으면 누구인들 반대할까.

우리의 과거사를 돌아보면 끊임없이 중국대륙의 간섭에 얼룩져 왔고 섬나라 일본의 괴롭힘을 당해 왔다.

19세기 서구의 열강이 한반도에 몰려 올 때 흥선 대원군은 민족자주를 지키기 위해 쇄국정책을 썼지만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화를 자초하는 계기를 만들었고,고종황제는 남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켜보겠다고 러시아공관에 피난까지 갔지만 치욕만 남겼다.

우리는 타의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타의에 의해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독립을 얻었다.

북쪽은 소련과 중국의 힘을 빌려 남쪽을 공격했고 남쪽은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의 힘을 빌려 그것을 물리쳤다.

6·15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아직도 6·25전쟁은 정전상태다.

잘잘못과 이즘을 따지기 전에 우리들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도 미국 중심의 집단안보체제에 의존하고 있고 많은 약소국들도 물론이다.

미군이 철수하면 민족자주는 이룰 수 있을까.

남북은 전쟁없이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을까.

주변강대국들은 우리의 통일을 진심으로 지지할까.

우리들의 자유민주체제를 지켜준 미군을 지금 와서 철수하라고 하는 것이 배은망덕한 일은 아닐까.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에 6·25전쟁에 참전했는데 우리가 나가라고 한다고 나갈까.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은 삐라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불안한 내일이다.

집에 돌아오니 "이 삐라 신고해야 되는 것 아니오"하고 아내가 물었을 때 "글쎄 어디에?"라는 대답만 했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