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대패밥 냄새가 향긋하게 풍기고 유령처럼 허연 나무 기둥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그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보면 몇 걸음 안가 발이 천근같다.

진흙이 달라붙어 신발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여기는 반침이 들어서고 저기는 부엌이야,그리고 여기가 다락이지.나는 동생과 함께 다람쥐처럼 나무 계단을 올라간다.

하루 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는 부모님과 달리 우리는 집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엉성한 채로 있어주기를 바랐다.

뭔가 툭 튀어나올 것도 같고 숨을 곳도 많아 숲 속을 헤매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조그만 의자 위에 올라가 풀 바른 종이를 덥석 받아 천장에 철컥 철컥 올려붙이는 기술자 아저씨가 신기해서 한참 보고 있으면 화려하게 이어진 천장의 무늬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풀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방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니 다 지어진 집도 그런 대로 좋았다.

방바닥은 따듯하고 밤은 깊은데 얇은 창호지 너머로 우두둑 빗소리가 들린다.

이마위로 떨어지는 것 같은데도 젖지 않고,등은 따스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이 아늑해진다.

아,좀 더 내려라.밤새도록-.나뭇가지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도록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바람도 거세진다.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흩어지고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늘어간다.

눈을 비비고 나가보니 훤히 밝은 새벽에 집 안 가득히 물이 들어왔다.

뒷마당 앞마당에 흙이 보이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자기 집에 물이 더 많이 들어왔다고 난리다.

간밤에 나를 아늑하게 유혹했던 비가 아침에 보니 꼼짝없이 우리를 가두고 협박한다.

그래도 나는 걱정과 근심은 엄마에게 맡기고 물 속을 휘저으며 걸어다녔다.

지금도 빗소리는 나를 유혹한다.

특히 밤에 듣는 빗소리와 바람이 나뭇가지를 휘젓는 소리는 아름답다.

아마 저 폭우 속을 걸으라면 사정이 영 달라질 것이다.

아직도 나는 철이 없나? 그런데 유명한 학자가 나처럼 철없는 소리를 한다.

''폭풍우 속에 내던져질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만 창 밖으로 볼 때는 즐긴다''고.

그 사람은 나 보다 먼저 그것을 ''창 밖의 판타지''라고 이름 붙였다.

창 밖의 판타지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에서 자동차가 달리다 찌그러지고 비행기가 폭파되는 장면을 즐기나 보다.

권투시합이 마지막 라운드에서 역전승을 해야 아파트 창마다 환호성이 터지나 보다.

그 유명한 학자는 ''창 밖의 여자''가 아니라 ''창 밖의 판타지''를 조심하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