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는 은행원의 발길이 유난히 무겁다.

추석만 지나면 몰아닥칠 2차구조조정의 태풍속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은행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고용불안.서울은행은 이미 명예퇴직을 통해 6백50명의 인력감축을 확정했다.

1주일동안 신청자를 받았으나 당초 예상인원에 못미치자 그동안 인사고과를 반영해 추린 퇴직대상자에 일일이 명단을 통보하기도 했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사실상 정리해고인 셈이다.

서울은행은 오는 9월말 정식으로 사표를 수리할 예정이다.

그나마 추석이라는 명절은 지내도록 은행측이 배려한 것이다.

서울은행 직원들은 퇴직자를 위해 이번 추석 상여금 1백%를 모두 반납했다.

이 돈으로 명예퇴직자들에게 위로금을 추가로 지급할 예정이다.

남은 자들이 떠나는 사람에게 보내는 작은 추석선물이다.

서울은행 관계자는 "일부 직원들이 사직서를 못내겠다고 반발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승복했다"며 "아직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퇴직대상자도 상당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른 은행들도 고용불안문제로 떨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이달말까지 경영정상화계획을 정부에 제출해야하는 은행의 직원들 심정은 더욱 편치않다.

추석이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반가운 가족 친지들의 얼굴을 보기가 즐겁지만 않은 탓이다.

이들 은행은 정부에 인력감축방안도 함께 제출해야한다.

현재 은행들의 인력감축안이 40대의 중간관리급(4급)에 집중되고 있는 사실도 이들을 우울하게 만들다.

한창 일할 연령에 직장을 떠나게 된다면 앞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일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한빛은행 관계자는 "직장은 괜찮냐고 물어볼 윗어른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아예 이번 추석때 가족들과 장래의 생활계획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량은행으로 꼽히는 은행의 직원들도 그렇게 사정이 좋지만은 않다.

2차구조조정속에 우량은행간 합병 등이 추진되면 결국 인원감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은 우량하지만 직원들의 입장은 다른 은행의 직원과 똑같은 처지다.

한미은행은 최근 48년생 이상 고참직원 일부를 대기발령시켰다.

이들 은행의 직원들은 지금도 경영실적이 좋은데 굳이 합병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하고 있다.

최근 잇단 은행권의 각종 금융사고도 고향으로 향하는 은행원들의 발길을 더욱 처지게 하는 요인이다.

한빛은행의 부정대출사건이나 평화은행에서 발생한 고객예금횡령사건으로 ''경제의 혈맥''을 담당한다는 자부심마저 크게 훼손된 탓이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치면서 고향에 내려가는 은행원들의 손도 가벼워지고 있다.

예전같으면 지점장이나 부서장이 직원들에게 간단한 선물도 했지만 이젠 아예 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 3년째 작은 정마저 사라지고 직원간에 삭막한 경쟁의식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서울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64조원이라는 자금을 썼다지만 그 돈은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데 들어갔다"며 "경제회복을 위해서라며 은행을 갖가지 정책수단에 동원하고 이에따른 손실은 모두 은행에 떠넘기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면서 기업부실에 대한 책임만 은행원들이 죄다 뒤집어 쓰고 있다는 불만이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어떻게 뵐지…"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자긍심마저 땅에 떨어진 한 은행원이 내뱉은 한탄이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