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25일자 프랑스 르몽드지는 ''필사본 2백97권을 둘러싼 한불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외규장각 도서반환 제2차 협상결과를 이례적으로 크게 보도한 적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하나는 93년9월 미테랑 대통령의 방한에 관한 것이다.

한·불 정상이 서울에서 만났을 때,르몽드지에 의하면 "회담의 주요 내용은 떼제베(TGV)판매였다.

이 거대한 거래를 쉽게 하기 위해 프랑스는 한국에 상징적 선물을 제공하고자 했다" 즉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의궤 한권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미테랑 대통령은 이것이 "양국간 상호대여의 첫 대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것을 반환이라고 이해했다.

다른 하나는 병인양요에 대한 르몽드지의 시각이다.

"프랑스 측에서 볼 때 이 분쟁은 미미해 보일 수 있으나 한국인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이 필사본들은 1866년 프랑스 군함이 한국 해안에 상륙해 빼앗아 온 것이다.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8천명의 천주교 신자를 학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위의 내용중 첫번째 보도는 도서반환 협상의 어려움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두번째 보도는 사실의 왜곡에 가깝다.

따라서 도서반환 협상과 진실규명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외규장각 도서문제에 관해 기록에 나와 있는 93년 양국 정상의 합의는 문화재의 ''상호 교환과 대여''였다.

그러나 이것이 국내 여론에 분명히 부각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혼란과 오해가 생겼다.

왜 그랬을까.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권을 돌려주면서 사용했던 현란한 외교적 수사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의도적 속임수는 아니었지만,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착각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나머지 의궤도 멀지않아 조건없이 영구 반환될 것 같은 과잉 기대에 사로잡히게 됐다.

우리 언론은 의궤의 영구 대여,영구 반환을 톱뉴스로 장식했다.

그러나 곧이어 커다란 난관이 조성됐다.

의궤는 원래 우리 것이었지만 프랑스 국내법에 의하면 공공재산에 편입돼 어느 누구도 정치적 목적으로 양도할 수 없는 프랑스 문화재다.

따라서 미테랑 대통령의 행동은 법을 위반한 권력남용으로 질타를 받았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도서전문직들이 연대해 항의했다.

한편 한국에선 다른 의궤들도 조건없이 반환될 거라는 기대가 생겼으나,이것이 허구임이 드러나면서 프랑스에 대한 대중적인 불신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때문에 미테랑 대통령의 방한 때 양국의 입장 차이를 명확하게 규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떼제베를 팔기 위한 프랑스의 외교와 비교할 때,우리는 치밀하고 냉정한 계산이 빈약했다.

감(感)과 기분에 의한 여론이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두가지 과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협상을 협상답게 하는 것이다.

협상은 전쟁이 아니며 제로섬 게임일 수 없다.

실사구시의 정신에 의해 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는 상생(相生)의 논리가 중요하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자료에 의하면,병인양요가 일어나던 1866년 9월 이전에 처형당한 천주교 신자는 2천명을 훨씬 밑도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반면 프랑스 해군의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것이 도화선이 돼 1871년까지 계속된 병인박해의 총 피해자가 8천명 정도다.

르몽드지는 오보를 한 셈이다.

프랑스의 침공이 훨씬 가혹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자 구실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해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간 것, 나아가 외규장각을 전소시켜 수많은 문화재를 소실시킨 것 등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한·불 관계가 일신하려면 도서문제는 협상의 논리로 풀면서 역사적 진실규명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역사는 투쟁의 장이 아니라 화해의 장이 될 수 있다.

아울러 협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가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을 정당화시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도 근거 있는 해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sjinhan@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