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이맘 때,건달 세계에서 두번째 보스 자리를 차지하고자 싸우는 건달들을 다룬 국산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잡혔다.

건달들이 무슨 말인가를 할 때면,분명히 입술을 달싹이는데도 대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을 자세히 보니,그들이 욕설을 내뱉는 연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영화의 감독이나 제작자 모두가 참으로 기특하게 여겨졌다.

청소년들에게 해가 될까 우려하여,욕을 할 때 소리는 내지 않고 입만 실룩이도록 연기 지시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1년이 지나서,이번엔 가족과 함께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12세 이상 입장가''영화였다.

주요 등장인물인 킬러는 애당초 대사가 주어지지 않은 배역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주인공인 형사는 입술을 뗐다 하면 욕설이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시종일관 그가 인정사정 볼 것없이 쏟아낸 욕을 모으면 족히 책 한권은 될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나는 1년 전에 본 영화를 떠올리고 실소를 머금었다.

그 영화 역시 원래 욕설을 입으로 발음하며 촬영했는데,''검열 과정''에서 묵음(默音) 처리를 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그때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야!

올 여름에 나는 또 여러 편의 우리나라 영화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영화에서 ''욕쟁이''가 등장했다.

이들 욕쟁이들은 작년에 본 영화 이상으로,조금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욕설을 남발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네 반 애들도 욕 잘하니" 아이가 대답했다.

"남자애들,두 명 빼고 나머지 열일곱은 욕을 아주 잘해.여자애들도 여러 명 그러고" "걔네들이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욕은" "첫째는 개가 나오는 욕.두번째는 열(10)을 나쁘게 바꿔서 강아지와 합한 욕" "그 다음은" 이 대목에서 딸아이는 아빠가 오늘따라 별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쳐다보더니 더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내가 사는 동네엔 중고등학교가 대거 몰려 있다.

산보하다 보면,퇴교 길에 학생들이 큰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곱살하게 생긴 여중생이나 우락부락한 남자 고등학생이나,어찌나 거침없이 얘기 속에 욕을 줄줄이 집어넣는지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한결같이 농도가 짙다.

무심히 들으면 개들이 흘레붙는 광경을 생중계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나 자신의 정서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시청을 중단한 드라마 중에,어린아이들도 즐겨 본다는 일일 드라마가 있다.

그날 안 보면 다음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기 십상이라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에선 "이 놈아" "저 자식이 정말"은 예사이고,어린애이건 여대생이건 애 아빠이건 "씨이 씨이"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닌다.

아마도 ''욕쟁이 영화''나 ''욕쟁이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은 이렇게 변명할 것이다.

"요즘 욕은 욕이 아닙니다.

별 뜻 없는 간투사나 군말에 가깝지요.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므로,욕을 넣어야 할 땐 최대한 넣어야 현실감이 살아납니다"

이런 의문을 띄워보는 건 어떨까.

바로 그런 영상물이 요즘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욕설이 난무하게 만든 주범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이고,정말 너무 하시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는 질타이십니다그려"하고 항변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좋다.

백보 양보하여 ''영상물은 세태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치자.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즘 청소년들의 욕설 문화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데 그런 영상물이 큰 기여를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걸 보고 애들이 무얼 배우고 무얼 흉내낼 것 같은가.

모두 정신 좀 차리자.자신의 입을 오염시킨 게 누군지 뒤늦게 알아챈 애들한테 욕먹지 말고.

wlees@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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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연세대 사학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
△소설 ''벽에서 나온 여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