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진성구는 서울대 병원 구내를 걸어가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혜정의 병실이 있는 5층에서 내렸다.

복도를 걸어가 당직 간호사가 있는 쪽으로 갔다.

"이혜정씨를 잠깐만 보려고요"

"요즘 불면증이 있어서 수면제를 복용하고 깊이 잠들었을 거예요.가족들도 방금 전 집으로 돌아갔고요"

"괜찮아요.그냥 옆에 잠깐 앉아 있다가 가지요"

"그렇게 하세요"

진성구는 복도를 걸어가 502호 병실 앞에 섰다.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으나 조금 열린 커튼 틈새로 들어온 달빛이 깊이 잠든 듯한 이혜정의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진성구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 이혜정이 누워 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상체를 숙인 채 잠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수면제 복용으로 깊이 잠든 이혜정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수월한 듯했다.

그는 얼굴에서 손을 뗀 후 상체를 숙인 채 잠든 이혜정에게 나직이 말하기 시작했다.

"혜정이,아이를 갖지 마.제발 부탁이야.아프리카에 가서 성수가 말한 의사부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거야.혜정이 의사 부인역을 맡는 거야.우리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보낼 행복한 시간을 생각해봐.야생동물이 자유스럽게 뛰어다니는 아프리카의 초원을 생각해봐.아프리카의 잔인한 햇살을 피해 가시나무 그늘에서 바라볼 아프리카의 대평원을 그려봐.그리고 해가 진 후 우리의 몸을 씻어줄 아프리카 평원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을 생각해봐.그리고 붉은색으로 온 세상을 채색한 아프리카의 석양을 상상해봐…"

진성구는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달콤한 말로 이혜정을 유혹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고보니 이 순간에도 자신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에 이혜정에게 보여준 것은 이기심과 유치함과 위선 이외에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챘다.

다시 얼굴에서 손을 뗀 후 고개를 숙인 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혜정을 사랑해.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누구보다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세상 어느 사람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무슨 짓을 해도 잊어버릴 수 없는 마음…그런 마음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믿어.그런 사랑은 남자의 가슴에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심어주는 줄 알아? 질투심이야.그런 질투심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저주로 변하지.나는 지금 내가 내린 저주에 벌을 받고 있어…혜정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질투심이 나를 눈멀게 했어.내 속마음을 몰라주고 결혼하려는 혜정에게 마음속으로 저주를 내렸어.혜정의 결혼이 파멸로 끝나길 바랐고,그렇게 되리라 믿었지"

진성구는 손을 뻗어 시트 위에 놓인 이혜정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아? 혜정의 결혼이 파경으로 이어지기를 바랐어.그러면 혜정이 나에게 돌아오리라 믿었지.아마 그때 내 심정을 혜정이 알았다면 나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 거야"

진성구는 이혜정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