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출 < 서울대 교수 / 외교학 >

일부에서 개혁피로 증후군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정권 초반기에 의욕적인 개혁을 시도하다 제대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정권 후반기에 와서는 개혁에 대한 의지가 약화되는 현상을 일컫는 것 같다.

개혁피로 증후군의 심각성은 그 원인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채 많은 사람들이 관성처럼 받아들이는 데 있다.

이 증상의 밑바닥에는 제한된 대통령 임기와 개혁의 난제 사이에 갈등과 격차가 전제돼있다.

개혁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비해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다는 점이다.

만연된 이런 생각은 집권 후반기의 정권교체 문제와 맞물려 정치권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 개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해왔고 민주화 이행 이후 유사한 패턴의 반복은 이런 믿음을 강화시켜 왔다.

이 논리는 상당 정도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지난 정권들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개혁피로의 근본 원인은 개혁 세력의 결집과 이의 정치화의 실패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성 정치권은 개혁을 대통령과 관료들의 과제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개혁에 관련된 법과 제도 개선에 관한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치권에 대한 비난은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건 각종 선거가 개혁을 평가하고 개혁에 대한 찬·반 세력을 결집하는데 거의 역할을 못해온 점이다.

동시에 정치권은 개혁의 실패에 대해선 건전한 대안 제시가 아닌 비난을 대통령과 관료들에게 퍼붓기 일쑤다.

여권도 개혁이 탁상공론을 떠나 국민 각계각층에 어떻게 느껴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개혁 피드백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 결과 결집되지 않고 파편화된 개혁세력은 그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최고 통치권자는 점점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개혁의 포장 역시 문제다.

지금까지 필요한 개혁의 종류와 내용은 수없이 지적돼 왔다.

특히 각 부처별로 건수 위주의 개혁들이 나열식으로 제시돼 왔다.

이렇게 수많은 개혁들의 중요성과 당위성 문제 이전에 개별 개혁의 정치·사회적 영향 판단과 한 개혁이 다른 개혁에 끼칠 영향이 얼마나 고려돼 왔는지 의문이다.

성공적 개혁이 가져올 정치적 영향을 바탕으로 그와 연계된 다른 개혁을 시도하는 유기적 개혁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관료적 개혁 접근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 될 것이다.

개혁의 당위성만 앞세운 저돌성은 불필요한 시간적 정치적 사회적 낭비를 부를 뿐이다.

개혁에 따른 소모전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부처별 노력은 물론 부처간 조정이 필수적이다.

개혁의 정치성과 함께 중요한 건 개혁사이클에 관한 정확한 이해다.

흔히 관료적 접근은 개혁의 시작에 집착해 개혁이 미칠 세부적이고 현실적 영향에는 민감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대부분 개혁 평가 작업은 개혁 내용에 치우쳐 있고 개혁이 국민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과 차이점을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는 게 현실이다.

개혁의 완결은 개혁의 시작과 이의 일상적 착근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개혁의 전략은 단순히 개혁간 조정의 문제 이상으로 개혁이 그리는 총체적인 체제 성격에 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진행되는 부처별 개혁들의 영향과 함의가 얼마나 깊은 연관 속에 고려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까지 진행돼온 개혁이 의미하는 체제적 청사진을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시점이다.

특히 개혁들의 진척 사항과 난점들이 정권의 문제인지, 내용 자체의 어려움이나 시간적 제약에서 오는 것인지 국민들에게 친절한 가이드와 설명이 요청되는 시기다.

개혁피로는 구조적으로 어느 정권도 피하기 힘든 현상이다.

이를 최소화하는 길은 개혁의 정치적 측면을 활성화는 것이다.

개혁의 나열과 기계적 집행보다 개혁의 영향에 대한 관찰과 배려,이에 기초한 정치적 전략 구상이 절실하다.

지금까지 우리의 개혁 접근법은 지나치게 관료의존적이었다.

개혁피로의 극복을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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