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년 10월 서울서 "1차 회의" ]


파리의 한.불 합동회의(1974년 3월24~25일)를 마치고 돌아오자 영국대사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다름아닌 한.영 경협위 설립문제였다.

프랑스와의 "경협위 설립"이 언론에서 떠들썩하니 영국도 몸이 단 모양이었다.

한.불 경협위원회가 발족되면 다른 나라도 움직일 거라는 필자의 예상이 적중됐다.

사실 필자는 1962년 11월 사무국장 취임직후 영국을 방문하여 FBI(영국경제연합체)와 협력제휴를 했다.

사리대로라면 영국과 먼저 협력위를 구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KAL의 에어버스 도입으로 갑자기 적극성을 보여 결국 "한.불 위원회"가 먼저 발족했다.

영국대사에게 물었다.

"한.영 위원회에서 우선 협의할 것이 무엇입니까"

영국대사는 서슴없이 "한.영 합작금융회사"를 생각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벌써부터 영국측과 협의해 왔다.

영국 런던은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이다.

우리는 외자유치뿐만 아니라 국제금융 운영의 노하우를 배워야 했다.

전경련도 서둘렀다.

전경련과 CBI(FBI; 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가 Confederation으로 명칭이 변경됨)는 1974년 3월 협력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한국측은 정주영 회장이 위원장이 되고,부위원장에는 상의의 왕상은부회장,무협의 남상수 부회장이 각각 추대됐다.

위원으로는 삼성,금성사,대우,삼양사 등 한국 경제계를 총망라한 80여명이 참가했다.

영국측에서는 9월2일 창립총회를 갖고 2차 대전 공군 영웅인 G.C.니콜스씨를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니콜스 위원장은 히틀러가 유럽 여러나라를 점령한 뒤 런던에 대폭격을 감행할 때 용감히 맞서 독일 전투기를 격추시킨 요격편대 대장이었다.

그는 항공기기 등 정밀기계회사 회장이었다.

영국측 위원으로는 롤스로이스,브리티시 옥시전,웨스팅하우스,제너럴 일렉트릭 등에서 60여명이 참가했다.

10월15일 서울에서 1차 합동회의가 열렸다.

한국측 의도대로 영국 금융자본과 합작할 종합금융회사 설립이 공동성명에 명기됐다.

이는 그후 외국자본과 합작으로 설립되는 금융회사들의 효시가 됐다.

전경련 정주영 회장이 "한.영 경협"한국측 위원장을 직접 담당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당시 현대는 조선사업을 시작하면서 외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정 회장은 한.영 경협위원장 자격으로 런던 자본시장에 뛰어들었다.

정 회장을 비롯한 한국 경제인들은 한.영 합동회의를 통해 런던의 세계적 금융인들과 직접 알게 됐고 거래도 트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양국간 또는 다국간 민간경제협력기구의 효용이라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 기업들은 규모가 작아서 개별적으로는 외국기업과 접촉하기 어려웠다.

75년 3월21일 런던에서 2차 합동회의가 열려 런던 자본시장 활용방안이 집중 논의됐다.

그 결과 75년 5월29일 시티 오브 런던(The City of London)의 중요 은행인 바클레이,증권거래소,런던 디스카운트 시장 대표 등 26명이 서울에 와 국제금융세미나를 이틀동안 열었다.

이 국제금융세미나는 한.영 민간합작금융회사 설립으로 이어진다.

한영경제협력기구 설립은 프랑스보다 늦었지만 영국은 왕년의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ica)의 저력을 발휘,대한 경협의 선두를 달리게 됐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라자드 브라더스와 한국종합금융을,힐 사무엘사와 새한종금 등을 설립했다.

이는 전경련 대외협력의 또 하나의 큰 성과였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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