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서울은 벌써 여름이 한창입니다.

잠못 이루는 밤이 많다는 나이드신 분들의 불평도 잦습니다.

이른바 열대야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그제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는 국가보안법폐지주장에 이어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 헌법 제3조를 고쳐야한다는 발언도 나왔다고 합니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의 만남이 있은지 채 한달도 되지않은 사이에 참많은 것이 빨리도 변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1년은 세계의 10년"이라고는 하지만,정말 생각해봐야할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80년 봄같지도 않았던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던 시절,그때의 사회상을 초등학교 하급반교실에 빚대었던 어느 시인의 표현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이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아이들도 따라서 읽는 하급반교실처럼 한가지 소리 밖에 낼 수 없었던 그때의 상황과 지금은 물론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여전히 하급반교실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모두 제 목소리만 내고있는 모습이 마치 선생님 없는 하급반교실 꼴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이자 자랑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김재익씨 부인 이순자 교수가 "아웅산테러는 가짜 김정일이 일으켰단 말인가""김대중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이란 도박에서 노벨평화상을 얻게될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의 자산중 조국 반공 애국 충성 명예 정의 용기 자유를 잃고 돌아온 것은 아닐까"라고 남북정상회담을 혹평할 수 있는 것도 남쪽이니까 가능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개헌론이나,종전까지 북쪽에서 상투적으로 들고나왔던 남북정치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갖자는 주장등도 같은 맥락에서 자유로운 우리 체제의 한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려해야할 측면 또한 결코 한두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으로 호칭하는데 조차 거부반응을 갖고있는 극우적인 사람들만 그런 우려를 갖는것도 아닙니다.

남북정상회담이 한미관계에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직 분명하지않지만,최근들어 그것은 전같지 못한 일면이 없지않은 것 같습니다.

6.25 50주년행사의 하나로 계획됐었다는 참전용사들의 시가행진을 한국정부가 취소시켰다는 얘기와 알링톤국립묘지에서 고어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행사소식을 대비시킨 미국신문들의 보도도 그런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남북정상회담이후의 급격한 변화가 집단이기주의적 단체행동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의 집단폐업움직임,롯데호텔및 의보공단파업에 이어 금융노조가 전면파업에 돌입하겠다며 이미 찬반투표를 마쳤습니다.

물론 두 가지 사안은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오랜 경험으로 보면 반드시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기론의 가치관에 변화가 빚어지는 시점에는 집단이기주의적 갈등이 증폭된게 보통입니다.

87년 6.29때와는 변화의 내용이 다르지만,어쨌든 올 여름에도 사회적인 갈등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않습니다.

저는 남북관계가 바람직한 진전을 이루려면 두가지가 선행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등 한미관계에 이상이 없어야한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남쪽의 경제가 잘돼야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햇볕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약사법개정작업이 본격화하면 또 의사나 약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서지않을지,은행원들이 정말 파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정말 걱정스럽고 짜증하는 여름입니다.

당사자들이 나라전체를 생각하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사려있는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되지 못할 경우 정부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위한 책무를 다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기없는 조치라 하더라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서울의 여름이 80년 서울의 봄처럼 역사를 뒷걸음질시키는 허망한 꼴로 끝나서는 안될 일입니다.

집단이기주의적 행동을 본의가 아니더라도 자칫 남북관계발전에도 장애가 될 것이란 점을 직시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