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초 중부전선 중공군 전초기지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중공군 1천8백명이 이날 점심 무렵 나타난 미공군소속 C47수송기에서 살포한 전단과 잇따른 귀순권유 방송직후 무기를 버리고 집단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예상외의 전과를 거둔 미 육군 일선 지휘부는 이날 집단투항의 가장 큰 공헌자가 바로 수송기에 탑승한 한국인 "여성 심리전요원"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상부에 이들에 대한 표창을 상신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전세가 혼미를 거듭하자 당시 유엔군 최고사령탑이던 미 극동군사령부(FEC)소속 심리작전처는 적군에 대한 심리공작을 강화했다.

심리작전처는 특히 산하 미 제5공군의 도움을 받아 일선은 물론이고 북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무대로 3백여차례 이상 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심리작전처는 적군에 대한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중국어에 능통한 김복주(작년 작고)씨 등 한국인 여성요원 4명을 배속받아 이들을 항공심리전 공작에 투입했다.

이들 가운데 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탑승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쟁기간 김복주씨 등 여성 심리전요원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피신한 부친을 따라 16세까지 북만주에서 지낸 김씨의 경우 51년 여자의용군으로 자원 입대하자마자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심리작전처로 배속됐다.

김씨는 이후 3년동안 방송반장으로 80차례 B26,C46,C47 등 각종 항공기에 탑승해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2백여시간의 항공심리전 공작을 벌였다.

벌집처럼 형성된 적의 대공 방어망과 또 예측하기 힘든 기상변화 등으로 김씨 역시 두 차례나 탑승기가 불시착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전역 직전인 1953년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으로부터 독수리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심리작전처 소속 한국인 여성요원들의 당시 활약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김씨의 유가족인 유상욱(43)씨의 말이다.

김씨는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한국전 당시 비밀공작 자료집인 "악마의 그늘에서(In the Devil"s Shadow)"를 인용,당시 적군 투항자중 상당수가 귀순권유 방송 등 항공심리전 공작에 의해 발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들의 활약상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