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초여름 땡볕을 피할 나무그늘이나 손바닥만한 공원조차 없다.

대신 어깨를 맞댄 낡은 공장 안에선 기름냄새와 함께 덜커덩하는 프레스 소리,쇠를 가는 그라인더 소리만이 퍼져나온다.

서울 성수공단.1천여 중소기업이 모여 있는 도심속 공장지대다.

대부분 종업원 20~30명의 영세기업들. 아남반도체 옆골목에 있는 "ㄷ"자로 생긴 공장.허름한 건물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예닐곱개 기업이 한지붕 아래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 자리잡은 대웅전기.이 회사 역시 셋방살이를 한다.

좁은 공간에 자재를 쌓아놓고 만드는 제품은 압력밥솥.연매출 3백억원 가운데 밥솥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종업원이 2백20명으로 조금 많다는 것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기업이다.

이런 업체가 일본 굴지의 가전업체들이 한국의 밥솥시장을 파고 들지 못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 뜻밖이다.

외제를 막는데는 평범한 종업원들의 적극적인 창안정신이 힘이 됐다.

중학교를 나와 운전기사를 하는 김희철 과장은 편리한 뚜껑개폐장치로 실용신안을 따냈다.

두자녀의 어머니로 살림을 하면서 공장에서 땀흘려 일하는 이원자 씨는 인쇄회로기판 배선구조를 개선해 실용신안을 출원했다.

역시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조연순 씨는 밥솥 외부에 긁힘자국이 생기지 않게 박스를 개량했다.

경리를 맡고 있는 김수일 씨는 압력밥솥에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물받이를 고안했다.

연구소에는 대졸 출신 연구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만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중졸 고졸의 생산직사원 운전기사 영업직원 등이 오히려 더 많은 개선안을 낸다.

학벌이나 특출한 재주는 없지만 일류상품이라는 거대한 산을 이루는 한줌의 흙이 되고 있다.

연구원들은 제안을 발명이나 실용신안 등으로 출원한다.

이렇게 해서 등록된 지식재산권이 무려 3백12건.출원중인 것도 1백15건에 이른다.

여기에는 9건의 해외특허가 포함돼 있다.

4백건이 넘는 지식재산권을 가진 중소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군산상고를 나와 창업한 김용진(55)사장은 기업발전의 원동력은 거창한 계획이나 기발한 묘수가 아니라 직원들의 작은 아이디어라고 믿는다.

어떻게 유도하고 활용하느냐는 경영자의 몫이고.적절히 보상시스템을 만든 것도 이 때문.채택된 고안은 건당 최고 8만원,특허출원은 10만원,특허등록은 3백만원까지 준다.

어느 기업이나 제안제도는 있다.

흘러간 경영기법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이를 잘 활용해 강한 중소기업을 만들고 있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게 아이디어내는 법이다.

인센티브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서.한 두사람의 지혜로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도 덧붙인다.

이 회사 복도에는 창안에 관한 글이 여러장 붙어있다.

그중에는 1회용 반창고에 관한 것도 있다.

요리를 하다가 칼에 자주 베이는 신부를 보고 안타깝게 여긴 존슨&존슨의 얼 딕슨이 1회용 반창고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고안이 세기적인 발명품을 탄생시키듯 기업을 사랑하며 내놓는 작은 착상은 거대 외국기업을 무너뜨리는 예리한 칼이 되고 있는 셈이다.

김낙훈 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