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백 사장,나 급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날 저녁 8시경 백인홍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도만용이 한 첫마디가 그러했다.

"무슨 일인데요?"

백인홍이 얼떨떨해 말했다.

도만용이 그에게 급히 부탁할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쉽게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다른 게 아니라... 이거 이런 부탁 하는 게 아닌데 일이 좀 급해서..."

"뭔데요?"

"한 1억2천만 원 정도 차용할 수 있겠어?"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내일 오전 10시경까지"

"그렇게 해보지요"

"고마워"

통화를 끝내고 나서 몇 분 지난 후에야 도만용이 차용하겠다는 1억2천만 원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백인홍은 깨달았다.

커미션으로 얘기가 오고간 0.7%와 합의한 0.4%의 차이가 0.3%이고 400억 원의 0.3%면 정확히1억2천만 원이란 계산이 똑 맞아 떨어졌다.

백인홍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만용이 요구하는 1억2천만 원은 돌려받을 수 있는 차용금이 아님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백인홍은 몹시 우울했다.

뭐라고 할까...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풀려고 늙고 간교한 창녀를 찾아갔다가 성욕은 풀지도 못한 채 돈만 빼앗기고 쫓겨난 기분이었다.

사업을 하다 전재산을 탕진하고 파산을 당했다 해도 이토록 우울하지 않을 듯했다.

도만용이라는 자에게 멋지게 얻어맞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만용의 간교함과 몰염치함과 뻔뻔스러움을 따끔한 말 한마디 할 수 없이,그리고 그에게 언짢은 표정을 보낼 수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백인홍은 이런 일을 당하면서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도만용은 이런 식으로 검은 돈을 훑어내 정치판에서 돈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과 같이 전심전력사업에 매진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면서 평생을 큰소리치며 편하게 지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런 세상이니 도만용 같은 자들과 상부상조하며 사업이나 무턱대고 크게 벌려봐?"

백인홍은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업은 어떻게 되든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짜낸 검은 돈으로 개인축재나 해봐? 그래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해버려?"

백인홍은 다음 순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도만용 같은 자와 다를바 없는 인간으로 추락하리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자신이 자칫 잘못 판단하면 도만용과 같은 자로 쉽게 추락할 수 있듯이 도만용도 누군가의 희생물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의 희생물인가?

백인홍은 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며 생각에 잠겼다.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정치인들이었다.

검은 돈을 마구 챙겨 축재를 하고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면서도 마치 타고난 지도자인양 신문이나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고 있는 정치가들을 도만용은 직업상 많이 대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심한 심적 갈등을 느꼈을 것이고 그런 갈등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들과 같이 도덕이나 양심에 무감각한 오늘날의 도만용이 되었을 것이다.

백인홍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