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형 < 서울대 교수 행정대학원 >

엄청난 감격이었다.

55년간 해묵은 냉전의 기억을 뒤로 하고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교환하는 광경은 가슴벅찬 "감동"이었다.

20세기의 구태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허덕이던 남북관계가 이제 감격시대로 접어든 것인가.

정상회담의 결실들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과 기대도 한껏 부풀어 가고 있다.

통일의 수사처럼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통일"은 한국인에게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당위로 각인된 지상명제다.

물론 "꼭 통일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남북이 그냥 사이좋게 살면 되지,왜 꼭 통일이라는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주로 젊은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이런 생각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6월13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에서의 극적 해후는 새삼 "통일이 민족적 대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

불안한 현재에 안주하려는 미망에서 벗어나자.

통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통일이 지당한 민족적 과업이라는 점만으로 발길을 재촉하기엔 불확실한 것이 너무나 많다.

사실 남북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무조건적 통일보다는 평화로운 공존 공영의 방식을 터득하는 문제가 아닐까.

통일은 그 내용과 그 것을 담을 그릇 등 모든 것이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각각 주장하는 목표와 방법에 대해서도 합의를 도출하기가 곤란하다.

반면 평화와 전쟁위험의 배제에 대해서는 손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남북의 지도자들과 대중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평화를 위한 상호존중과 통일을 향한 진지한 전진의지일 것이다.

광폭정치인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세계정치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외세배제-자주통일론에만 얽매이지 말고 그 대화의 파트너가 된 김대중 대통령에게 "섭섭하지 않도록" 신축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경제교류협력 문제가 미군철수나 국가보안법 철폐 또는 자주통일과 같은 고차적 정치문제보다 결코 덜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반면 김 대통령이나 그를 수행한 각료들 역시 우리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미 어떤 다리를 건너고 있는지를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감격의 기쁨으로 정상회담을 하면서 상대방의 국기를 내걸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한다면 그 우호적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을까.

물론 북한에서 남한의 태극기를 내건 대학생은 없을 것이다.

또 엄연한 실정법위반이라며 그것을 문제삼는 검찰의 고육지책을 북한측에서 양해하도록 요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국기 가운데 게양하거나 남북정상회담을 경축하는데 인공기가 사용됐다는 이유로 형사소추권을 발동하는 것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시작된 새로운 남북 화해협력시대에 맞는 일인지 깊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를 위한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이제 그에 따라 정책환경이 변화됐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통일을 향한 화해협력의 도정에 들어선 남북 관계에서 요구되는 상호존중의 정신에도 부합한다.

김 대통령이나 수행 각료들은 아마도 정상회담 자체에 몰두하고 있겠지만,동시에 누군가가 정상회담 이후의 과제들을 벌써 챙기고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남북정상회담 이후 전개될 남북관계의 변화에 걸맞게 냉전시대의 잔재인 법제도적 구조물들을 제거 또는 처리하는 일,그것이 가져올 영향과 여파를 고려해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조절하는 일 등등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김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지도력과 외교적 능력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종래 테러국가 또는 평화위협세력으로 알려져 왔던 북한의 이미지를 일신해 공산주의적 이성을 주장함으로써 김정일식 세계정책의 첫 행보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성공이 자신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당당하게" 기록될 수 있으려면 남북 관계에서도 진정한 광폭정치를 해야 한다.

남측도 마찬가지지만,북측도 남측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1국양제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진 그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의문부호를 찍고 있다.

이 점 누구보다도 김 국방위원장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