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수 <경희대 교수. 아태국제대학원장>

재벌의 공과는 오랫동안 논의돼왔다.

고속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보다는 정경유착 문어발경영 경영권세습 등 여러 부정적 수사들만이 특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IMF위기 극복을 위한 기업구조조정 정책의 핵심은 기업지배구조 개혁이었다.

국내에선 최근에야 주목받고 있지만,국제사회에선 수년 전부터 관심을 끌어 온 과제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국제규범을 제정해야 하며,이를 위한 새로운 협상 라운드가 출범해야 한다는 의견마저 제시되고 있다.

OECD가 주도했던 다자간 투자협상이 종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주춤한 상태이나 국제규범의 필요성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폭넓은 공감대는 이미 형성됐다고 보아야 한다.

기업지배구조 논의는 기업소유주인 주주와 경영진간의 문제를 파악해 가장 효율적인 회사경영과 이의 감독체계를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의 경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고,세습경영이 이뤄지는 것에 대한 비난이 높기 때문에 경제적 논리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려는 위험이 있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논의는 지난 1980년대 중반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미국기업의 경쟁력이 왜 떨어지는가에 대한 요인분석에서 비롯됐다.

미국의 경쟁력정책심의회 보고에서 일본기업은 주거래은행의 안정적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장기적 투자를 할 수 있었던 반면,미국기업은 단기적 투자에 주력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대두된 바 있다.

소위 주주자본주의( shareholder capitalism )의 단점과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stakeholder capitalism )의 장점이 대비됐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후 일본과 독일의 경제성장이 미국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지자 새로운 시각에서 논의가 전개됐다.

독일은 통일비용의 부담으로 경제가 휘청거렸고,일본은 버블경제의 후유증으로 장기 침체기에 접어들게 됐다.

이러한 경제성장의 역전상황을 반영해,일본과 독일의 기업지배구조는 신기술을 기업화한다든지 또는 대외 환경변화에 적합한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비판,그리고 주거래은행과 기업간의 상호주식보유 관행이 거품경제를 야기한 요인이라는 지적마저도 나오게 됐다.

한편 선진국의 노령화현상이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을 부채질했다고 봐야 한다.

성장잠재력은 쇠퇴하는데 축적된 자본량은 많아 이를 성장가능성이 높은 신흥공업국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거시경제적으로는 연.기금의 경제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고,수많은 노령층의 수입이 자본소득에 의존하게 돼 이 자금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즉 수익성과 기업지배구조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국제기준에 비춰 볼 때 노동 환경 무역 금융자유화 등 어느것 하나 미진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국제사회가 드러내놓지 않고 한국을 가장 이상스럽게 보는 것이 바로 기업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경제상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시장경제의 근본이 제도화 돼 있지 않다고 여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시대변화에 상응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사소한 유인정책이 실효를 거둘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만병통치약적 해법을 마련할 수는 없겠지만,적대적 인수.합병을 자유롭고 쉽게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정비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첩경이다.

과거 체제에서 성공한 1세들을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니 무조건 물러나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2세들은 경영능력이 없다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다.

국민들은 외국과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있고 정부는 개혁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해결의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다.

외국인에 의한 인수.합병은 국부유출이라는 잠재적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은 재벌에 발목잡혀 있고,관료는 관치경제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국익을 앞세우고 시장경제 운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진정으로 치열한 국제적 경쟁을 도입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데 머뭇거리는 것이 문제다.

재벌들은 기업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략적 제휴를 고려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현재의 소유구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수.합병과 다르다.

만약 이러한 목적에서 시도한다면 이는 트릭이며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는 적대적 인수.합병의 걸림돌을 제거하는데 전력을 경주해야 한다.

chskim@ 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