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유학이 남긴 교훈 ]

로스토 박사는 패기 만만한 미국 소장학자답게 자기도취에 빠진 듯 열변을 토했다.

산업혁명의 선도자인 영국에 뒤진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이 공업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큰 추진력이었음을 강조했다.

약 40분의 발표가 끝나자 곧이어 질문 토론에 들어갔다.

그런데 앞줄에 묵묵히 앉아있던 로빈슨 교수가 손을 들었다.

모두 긴장했다.

"로스토 박사는 공업화의 추진력으로 민족주의를 거론하고, 그 예로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을 들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 제국은 어떤 의미에선 민족주의가 이들 유럽 나라들보다 더 강한 것 같은데 왜 선진 공업국이 못되고 있는가"

로스토 박사는 완전히 허를 찔린 것 같이 보였다.

그는 청산유수와 같은 강의 때와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물쭈물했다.

"남미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으로 유럽 민족주의와 경제발전 요인으로 성질이 다른 것 같다"

이런 답변을 하자 로빈슨 교수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난센스"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저 작은 여교수가 저런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하고 나는 놀라기도 하고 영국 학계의 토론문화의 표본을 보는 양 큰 감명을 받고 오늘날까지도 그 장면을 지울 수 없다.''

좀 생각해 보자.

젊은 후배이지만 로스토 박사는 미국에서 온 객원교수로 손님인 셈이다.

''난센스''란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는 것인데, 이런 학술토론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필자는 잘 몰랐다.

그때의 분위기로는 마치 로스토 교수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따위 학설이 어디 있느냐 하는 식이었다.

진리탐구 마당에서는 체면이나 가식 같은 것은 없고 촌철살인하는 불꽃 튀기는 설전, 토론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런 사례를 여러번 영국에서 목겼했다.

본론과 관계는 없으나 영국 토론 문화의 또 한 장면을 소개한다.

1958년 인도독립 헌법제정 기념행사가 런던대학에서 열렸다.

인도 네루 총리의 누이동생, 이 분도 유명한 독립투사요 유엔(국제연합) 의장까지 지낸 청치가였는데 이날 기념 연사로 초청됐다.

독립투사들은 대부분 그렇지만 네루 여사도 강연도중 어렵던 식민지 시절을 언급할 때는 흐느낄 정도의 열변을 토했다.

토론에 들어가서(영국사람들 특히 학생들은 토론을 매우 즐긴다)영국측 참가자(이분도 명성이 높은 분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이 회고조로 "그래도 대영제국의 인도통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 개명(enlighten) 된 식민지 통치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축하하는 훌륭한 인도헌법도 만들었고, 세계에서 제일 큰 민주국가도 세울 수 있지 않았는가"

이 초대된 손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루 여사는 마이크를 빼앗다시피 하고 "뭐, 영국식민지 통치가 비교적 개명된 것이었다고. 이거야말로 난센스군. 식민지 통치에 무슨 개명이고 문화적이고 하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느냐. 모든 식민지 통치는 인류의 야만적 범죄행위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발언한 영국 신사가 몸둘 바몰라 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다시 본줄기로 돌아간다.

그후 1963년께부터 로스토의 ''경제발전 제단계론''은 한국말로 번역돼 마치 발전 전략의 바이블인양 우리나라 지식층과 대학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사실 본인도 그의 발전단계론에 대한 논평들을 어느 월간지에 소개한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학자 뿐만 아니라 관리나 정치가들 사이에서까지 ''take-off''라는 용어가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take-off만 되면 우리도 공업국이 될 수 있다는 이정표 같은 간절한 우리의 목표를 상징하는 낱말이 된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