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 비용/인력지원 ]

8년여의 준비 끝에 1970년 7월1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창립됐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란 정치는 민주제,경제는 시장경제체제,사회는 다원화된 기능단체발달이 필수조건임을 필자는 지적했다.

필자는 미국 유학(1954~57년)때 근대사회에서의 다원화 실상을 목격하고 감명 받았다.

근대국가 사회건설에 있어서 다원주의자의 신념을 굳혔다.

영국에 가서는 입헌군주제 기틀이 된 대헌장(마그나 카르타.1215년)의 주역인 이오맨(Yeoman,자유민 자작농)의 존재에 매료됐다.

이오맨의 신조인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나의 집은 허가없이 침범할 수 없는 성과 같다.

이것이 바로 영국 민주주의의 뿌리요,사고의 근간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이는 한국이나 중국의 전제 왕권주의제와 근본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기초부터 각 분야의 성과 같은 기능단체를 창설,근대화의 토대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필자가 지금부터 서술할 각 분야 사회단체 설립 구상의 밑바탕이었다.

한.일국교가 수립되고 일본차관에 의해 많은 공장들이 세워졌다.

시설만 갖고 제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는 없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기술은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으나 고급기술은 비싼 돈으로 사와야 한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도 진짜 기술은 사기 어렵다.

상대국가들은 기술보호장치를 요구한다.

60년대말부터 일본은 조속히 "공업소유권 보호협정"을 맺자고 요구해 왔다.

이 즈음 일본 특허청장이나 공업소유권 전문가기술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필자를 찾았다.

경제계에서 "공업소유권 보호협정"의 필요성을 정부에 건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에 건의하는 것보다 급한 것은 경제인들에게 공업소유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재산권보호가 자본주의 기본인 것처럼,공업소유권 보호가 기술발전과 교류의 기본이자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경련은 상공부 특허국과 협력,특허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짰다.

당시 특허국장이었던 전준항(전 한국변리사협회 회장)씨가 초창기 특허교육에 헌신적으로 협력해 줬다.

지금은 상식이 됐지만 특허란 "발명특허, 실용신안, 의장, 상표"로 대별된다는 기초부터 가르쳐야 했다.

공업소유권보호란 방어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 특허권을 외국에 어떻게 등록,보호받느냐 하는 문제도 대두된다.

1972년부터 공업소유권 문제는 한.일 양국 정부와 민간경제계 회의에서 단골 의제로 제기됐다.

정부도 이에 대응"공업소유권 관계법"을 전면 개정,정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상공부 특허국장 문기상씨는 관료로서는 보기 드문 적극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루는 필자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공업소유권 관계법을 개정하려면 외부 전문인력 협조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부 예산은 한 푼도 없소.

더욱이 시일이 촉박해 전문가들과 함께 특허국 직원들이 합숙작업을 해야 하오.

전경련의 소요경비를 지원했으면하오"

그러면서 "소요 경비를 특허국에 건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전경련 직원이 나와서 직접 경비지출을 맡아 주었으면 하오"

이렇게 전경련의 경비지원을 얻어 외부전문가,특허국 및 전경련직원 등 10여명이 2개월 합동작업 끝에 개정법률 초안을 마련했다.

정부도 다급한 지라 이 초안을 즉각 받아들여 일사천리로 개정법을 제정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할까.

공업소유권 관계법 개정작업이 끝나자 마자 대검에서 특허국 직원과 전경련 윤태엽 사무국장 및 경리 직원을 소환했다.

내용인 즉 문기상국장이 전경련에서 돈을 받아먹었다고 누군가가 투서했다.

물론 문 국장을 모함하려는 작자들의 소행이었다.

전경련 경리직원인 장군이 꼼꼼하게 정리한 장부와 명세 덕분에 문국장이나 특허국 관리들에 대한 무고임이 완벽하게 입증됐다.

요즘에도 1년에 한 두번 문기상 변리사를 만난다.

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서로 웃음을 나눈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