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련 은행민영화 건의 ]

얼마전 국민은행 노조가 "관치인사""낙하산행장"이라며 은행장의 출근을 제지한 일이 벌어졌다.

이유가 어디있든 좋지 않은 일이다.

"관치금융"탈피는 시장경제의 필수 조건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금융이야 말로 자금동원과 배분의 중추신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1962년 전경련 사무국장에 취임하자 금융기구의 "독립과 자율성 보장"을 장기과제로 설정했다.

그리곤 기회있을 때마다 이 장기목표에 접근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부단히 애써왔다.

1965년 전경련이 첫 미국경제사절단을 파견할 때 세계은행과 IFC (국제금융공사)와 협의,"한국개발금융( KDFC )을 설립한다(참조:김입삼회고록,한경).

이 KDFC 설립은 세계은행 및 주주인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세계 유수 은행의 주식참여를 이룩했다.

그러나 필자의 근본 의도는 다국적 금융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선진 금융기법과 운영,특히 자율적 운영 방식을 도입해 보급시키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KDFC 의 활동영역에서만이라도"관치금융"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본격적 기도는 1970년대초 은행민영화에 집중됐다.

1967년 1월 전경련은 시중은행 민영화를 공식 제기했다.

이후 기회있을 때마다 "은행민영화"문제를 정부에 건의한다.

그런데 구체적 검토에 들어가니 은행의 부실채권이 너무 많아 그대로 인수 운영할 수 없음이 판명됐다.

그래서 차라리 인수보다 은행을 새로 설립키로 했다.

1973년 1월 재계의 광범위한 주식참여 원칙에 따른 은행 신설안을 마련했다.

당시의 "은행신설안"을 필자는 보관하고 있다.

금융기관이나 언론사같은 공익성 높은 기구는 개인이나 몇몇 기업체가 소유하게 되면 득보다 해가 클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을 필자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주식공개소유"형태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필자는 전경련 대기업들과 협의한다.

지금도 이 협의과정 기억이 어제 일 같다.

특히 효성 설립자 조홍제(조석래 효성회장의 선친)회장과의 끈질긴 대화 기억이 뚜렷하다.

필자는 은행 소유주식 상한선 8%안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조 회장은 8%상한선 근거는 무엇이며 그렇게 될 때 주식이 너무 분산돼 주인없는 은행이 될 염려는 없는가 등등 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필자는 ''은행의 철저한 주식공개''와 ''투명한 경영''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인내심있는 설득에 조 회장 등 회원들도 납득했다.

다음은 정부의 승인문제다.

당시 남덕우 재무장관과 협의했다.

특히 남 장관은 필자의 은행주 소유 상한선 8%와 주식공개 안에 찬성하면서 적극 추진할 것을 부탁했다.

전경련의 "민간은행 설립안"이 무르익자 무역협회 몇몇 회원은 수출금융을 전담할 "무역은행"설립을 서두른다.

그런데 설립자금은 회원사들이 갹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출진흥기금"에서 염출하자는 구상이다.

이 "기금"은 "청와대 수출진흥확대회의"결정(1969년 1월)에 따라 "수입금액"의 1%를 징수해 왔다.

무협측 건의에 따라 이낙선 상공장관은 주무장관인 재무장관도 모르게 극비리에 무역은행 설립안에 대한 대통령결심을 받아 놓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남덕우 재무장관은 난감해 했고 필자에게 순수 민간은행 신설계획이 암초에 부딪혔다고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되자 "무역은행설립"을 놓고 무협과 전경련은 정면 대립하게 됐다.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공금인 무역수출진흥기금으로 은행을 설립한다는 것이 순수 민영화라 할 수 없고 "무역수출진흥기금"사용 목적에도 위배된다고 극력 반대한다.

결국 이 대립속에 무역은행이나 순수 민간은행의 신설안도 좌절되고 만다.

필자는 지금도 민간은행 신설안 좌절을 아쉽게 생각한다.

순수민간은행 설립으로 은행운영의 독립성 자율성 투명성이 보장될 기회가 좌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