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38년 12세 소년때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던 조남기(74)씨가 중국 군최고위직과 공산당 중앙위원을 거친후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이 돼 다음달 하순 고국에 돌아온다.

한국전쟁때는 중국후근부 사령관 통역장교를 지낸 조부주석은 조선족은 물론,소수민족을 통틀어 중국 정계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26년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에서 태어난 조씨는 1919년 3.1운동 당시 대봉화 횃불시위를 주동,공주감옥에 3년동안 투옥됐다 풀려난 독립운동가 조동식을 따라 1938년 12살되던 해 동북부 지린성 융지현으로 망명했다.

조부주석은 이번 62년만에 고향땅을 밟아 열흘동안 머물면서 고향 친지들과 감격의 만남을 나누고 국회 간부 등 주요인사들과도 회동을 가질 예정이다.

조부주석의 인척중에는 육사 18기생으로 기무사령관과 교육사령관을 지낸 조남풍 예비역 장성이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만주 지리중학을 졸업한 뒤 중국 팔로군 입대(44년),동북군정대학 졸업(46년)을 거쳐 군문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3년후인 47년에 중국 공산당에 정식 입당했다.

50년 6.25동란때는 중국 인민해방군 후근부 사령관인 홍쉐즈의 통역으로 일해 당시 중국군의 참전상황에 관한 세부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부주석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당시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으나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종전후에도 그는 군 참모,과장,연구원,군분구 정치부 주임,제2정치위원장 등 중견간부 등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인 68년부터 73년사이에는 친 마오쩌둥 세력의 군부 숙정작업에 따라 한때 박해를 받아 군문을 떠나야만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지난 73년 군핵심요직으로 복귀,지리성 옌볜 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 주석,80년 4월 지린성 인민정부 부서장을 맡았으며 82년부터 97년까지 세차례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중국내 소수민족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그는 87년 후근부 사령관에 오른 이듬해인 88년 중국군 최고계급인 상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93년이후 국가 군사위원에서 물러나면서 군지도층에서 제외되는 정치적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98년 3월 제9기 정협에서 31명의 부주석중 한명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조부주석은 남북한 양쪽 모두의 사정에 밝아 지난 98년 6월엔 북한과 인접한 지린성 정협대표 10여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 평양방송은 조부주석이 중국군 최고계급인 상장을 지냈다면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정두환의장 등의 환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98년 방문당시 북한의 조국전선서기국장 백남준은 만수대의사당으로 조부주석을 초청해 환영회를 베풀면서 중국과 북한의 친선발전을 강조했다고 베이징방송은 보도한 바 있다.

정협은 과거 중국의 의회역할을 하다 그 기능을 현재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내주고 통일전선조직으로 변신,통일문제와 외교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번 방한은 과거 친북한 쪽으로 기울었던 중국의 한국에 대한 국방,외교노선에 어떠한 변화의 신호가 될지 주목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조부주석은 방한기간중 출생지인 청원군 태생리의 선영에 성묘하고 인근 청주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또 국내 정.재계 인사들과 만나 양국의 우호증진 및 국내 기업의 중국 투자문제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