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점부터는 사장단 전원이 비교적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넷 사업에
관한 이현세 이사의 설명을 경청하는 듯했다.

하나 박인호 사장이 지칭한 대로 주판 세대의 한계인 듯 겉으로만 그랬지
대부분의 사장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현세의 설명이 끝난 후 진성호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나왔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진성호가 검지를 뻗은 손을 들어 강조하며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기업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닌 주식 시가총액입니다.

우리 그룹의 목표는 2000년까지 주식 시가총액으로 10대 그룹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사업은 이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 그룹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또한 전망 있는 미래 산업은 인터넷 관련 산업과 더불어 저희 그룹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레저산업입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60세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보면
레저산업 혹은 실버산업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진성호가 주먹 쥔 손을 흔들기도 하고 화이트보드 앞을 왔다갔다 하기도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우리 주판 세대는 이제 레저타운에 가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거
아니요?"

박인호 사장이 껄껄 웃으며 다시 엄숙한 분위기를 깼다.

진성호는 화를 삭이며, "저런 한심한 놈, 저 정치판 떨거지를 없애
버려야지만 분위기를 잡겠는데..."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현 권력자의 사돈이 취직을 부탁해서 마지못해 자리를 준 허수아비
사장의 경우라 현 정권이 갈릴 때까지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성호
는 알고 있었다.

"박 사장님은 실버타운보다 정치판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정치판이 더 재미
있지 않습니까?"

진성호가 미소 속에 뼈 있는 말 한마디를 했다.

"정치판은 돈과의 전쟁터요.

돈이 있어야 정치를 하지요.

진 회장께서 스폰서를 해준다면야 정치판에 가서 한바탕 할 의사도 있지요."

박인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정치판은 돈과의 전쟁터고, 검찰은 무슨 판인지 아십니까? 폭탄주와의
전쟁터지요.

폭탄주 일곱 잔 정도 못 마시면 행세를 못해요."

법과대학 출신인 계열사 사장이 끼여들었다.

진성호는 그렇게 말하는 계열사 사장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주며 헛기침을
몇 번 해 분위기를 잡았다.

"제조업인 직물 분야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황무석 부사장이 물었다.

"선친께서 창업하신 모체가 직물 분야라 저도 애착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계획으로는 마땅한 원매자만 나오면 국내와 중국 청도에
있는 공장은 처분하고 대외무역 업무에 치중하려고 합니다.

현재 1,000여 명의 현지 직원이 있는 청도 공장 매각 상담은 활발히
진행중입니다."

진성호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