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관우 < 키텔 대표 >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우리 회원과 직원들의
공동체의식이었다"

박관우(38) 대표는 IMF 경제위기 때 거의 부도직전까지 갔던 키텔( Kitel )
이 최근 인터넷폰과 전자상거래를 결합한 통합서비스로 화려하게 부활한
비결을 이렇게 소개했다.

키텔은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인 1994년에 하이텔 천리안 등과 함께 어깨를
겨루던 PC통신 1세대 기업이다.

하이텔 천리안과 경쟁하기 위해 유일하게 무료로 PC통신서비스를 시작했고
회원이 급증했다.

IMF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인 1997년 11월 회원수가 42만명에 이르러
경쟁업체를 따라잡기 직전까지 왔다.

IMF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유료였던 하이텔 천리안의 회원들이 대거 키텔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회원은 급증하는데 주수익원인 광고는 날로 줄어들어 기업은 오히려
생존의 기로에 처했다.

이때 직원들과 박 대표의 점심은 늘 컵라면 아니면 집에서 싸온 도시락
이었다.

그래서 "키텔사무실에 가면 점심시간에 항상 김치냄새가 진동한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이게 생활양식이 됐는지 아직도 30명 직원중 도시락파가 7명이나 남아있고
박 대표 자신도 컵라면 점심을 즐긴다.

박 대표는 생존의 위기에 처하자 눈물을 머금고 발전전략을 포기하고
생존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회원들에게 자본참여를 호소했고 무려 1천4백여명의 회원들이 한푼 두푼
모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1억원을 보내주었다.

이로써 키텔은 "국민주 벤처기업"으로 탄생한다.

벤처기업중 키텔만큼 주주가 많은 회사도 없다.

5주, 10주를 가진 주주도 수두룩하다.

1998년부터 기업전략을 생존에서 도약으로 전환했지만 98년에는 매출액이
고작 1억1천만원에 수지는 당연히 적자였다.

99년 회사를 완전한 인터넷 기반 기업으로 전환하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다각화를 하려 하자 자금이 필요했다.

한두명의 대주주도 아닌 1천4백여명의 주주가 만든 국민기업인데 거기서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출받을 형편도 안됐다.

그래서 회원들과 공생하다는 "나눔의 정신"을 주제로 이틀간의 세미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직원들이 상생정신에 입각해 2억원을 출자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됐다.

자금위기는 넘겼지만 외부의 평가는 여전히 싸늘했다.

"키텔은 이것 저것 사업은 많이 하지만 핵심사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터넷폰과 전자상거래를 결합한 큐티텔( qpTel.com )서비스를
창안했다.

다이얼패드의 PC-폰같은 일방적 전화만이 아니라 PC-폰, PC-PC로 무료전화가
가능한 고기술 인터넷폰을 개발했다.

또 이를 전자상거래 때 주요 수단으로 쓰게 했다.

웹상에서 물건을 구매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이 무료전화로 바로
문의하고 상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투자자가 쇄도하고 있다.

이번에 30억원을 증자하는데 벤처게이트 금창창투 건영식품 등이 투자를
결정했고 일본의 이토추상사 마루베니상사도 참여한다.

일반투자자들에게도 7억원을 배정했는데 벌써 20억원의 청약서가 날아와
이를 줄이느라 고심할 정도다.

현재 기업가치를 최소한 액면가의 6배 이상으로 보는데도 박 대표는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주주들을 배려해 3배만을 불렸다.

이것도 상생정신에 입각한 판단이었다.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 조직운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고
말하는 박 대표는 "직원들과 동료애를 느끼며 늘 같이 행동해왔다"고 자부
한다.

이런 경영스타일이 자기중심적 생각이 강한 N세대 직원들을 정서적으로
끌어당긴 것 같다고도 했다.

그래서 IMF라는 위기에서도 직원들이 한명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재산을 털어가며 위기에 처한 기업을 구해내도록 유도해냈고 오늘의
영광을 가져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02)651-1900

< 안상욱 기자 sangwook@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