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전후해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제일 먼저 1918년11월 만주와 러시아령에서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됐고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 서울에서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그중 "2.8독립선언서"는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작성되고 선포됐으며 3.1운동
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1919년2월8일 오후 2시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6백여명의
한국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항일독립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영어와 일어로도 작성해 일본정부 요로 각국
외교관들에게도 배포했다.

현장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검거됐으나 최팔용 등 대표 10명은 실형을 받아
1년동안 옥살이를 해야했다.

2월8일부터 5월15일까지 유학생 3백59명이 귀국했고 그 가운데 1백27명의
행선지가 서울이었다고 당시 일제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들이 음양으로 민족운동대열에 뛰어들어 현상윤 송진우 최린 등 민족
지도자를 만나고 3.1운동을 심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기록이다.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때 참고했다는 "2.8독립선언서"의 내용은
"3.1독립선언서"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2.8독립선언서"의 "결의문" 말미에 "독립이 될 때까지 혈전을 벌일
것"이라는 대목은 "공약삼장"이라는 약속보다는 학생들의 기백과 강력한
의지가 표현돼 있다.

96년 국가보훈처가 친일경력자들의 독립유공자 예우를 박탈할 때 2.8
독립선언 관계자는 5명이나 끼였다.

선언서작성자 이광수까지 넣으면 소위 친일한 자들이 너무 많다.

나약한 지식인들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독립운동의 역량부족
때문이었을까.

일본 도쿄 YMCA에서는 오늘 "2.8독립선언선포 81주년 기념식"이 열린다고
한다.

광복회장과 유족37명이 그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소식이 감감하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