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택 < 서울대 명예교수 / 학술원정회원 >

독일을 영국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리스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었다.

"어떤 국민의 물질적 자본을 발전시키는 기동력은 그 국민의 정신적 자본
이다"

리스트는 "정신적 자본"을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뤄낸 발견 발명 개량
완성 등을 축적한 결과"라고 규정했다.

즉 정신적 자본은 "문화적 축적"이라는 것이다.

리스트는 또 "정신적 생산력이 물질적 생산력을 생산한다" "산업은 학문과
윤리의 소산이다"라고 역설했다.

필자는 1백여년전 경제학사를 회고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이 당장 취해야 할 경제정책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1980년대 카터.레이건 시대에 미국경제가 기울자 피터 드러커는 공공연하게
사회경제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드러커에 의하면 일국의 경제발전의 정도는 "고기술 중소기업(고급제품
메이커)의 다양화"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드러커의 사회경제학 체계는 "학문의 전문화->기술의 세분화->고기술
중소기업의 다양화"로 요약된다.

필자는 작년에 17개국에 8개 핵심상품을 수출하고 있는 대한펄프에 직접
가본 뒤 한국에도 고기술 중소기업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만족했다.

드러커는 "학문이야말로 국제 경쟁력의 핵심요소"라고 말하고 있다.

리스트의 사회경제학과 드러커의 사회경제학은 비슷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경제정책은 단순한 경제적 시점에만 국한되어
있었고 근본적인 것을 등한시했다.

해방후 50년동안의 한글 전용정책이 "정신적 자본" "정신적 생산력"을
완전히 파괴시켰다고 생각한다.

한국도 한자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뜻을 알 수 없게 음으로(한글로) 쓰고
있다.

자연과학책을 펴보면 "묵힘과 익힘" 등의 개념이 나온다.

이러한 저질 개념이 일본책에 나오는 명석판명한 "전자제어 연료분사장치"
"난연성 가소제" 등의 고급 개념에 어떻게 대항하겠다는 말인가.

필자는 글을 쓸 때마다 한자를 부흥시켜 그 기초 위에서 민족생존의 기본이
되는 "정신적 자본" "정신적 생산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경제윤리를 특히 강조한 사람은 독일의 막스 베버였다.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불로소득 배격"이라
는 자본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학자들이 이를 주장했다.

"논어"에 표현되고 있는 "불환과환불균"을 실제로 실현하는 것이 일본의
"유교 자본주의"가 아닐까.

일본에는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똑같은 크기의 집들이 많다.

균등주의 사상이 매우 뿌리깊게 일본인의 인식 속에 박혀있는 증거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사회를 "일본형 평등사회"라고 부른다.

일본경제는 자본가, 주주를 위한 "개인 자본주의"가 아니고 경영자도 노동자
도 똑같이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회사 본위주의" 또는 "법인 자본주의"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학문의 전문화->기술의 세분화->고기술 중소기업의 다양화"가
순조롭게 잘 이루어져 지난 96년에 전체 제조업체 77만1천7백91개사 가운데
중소 제조업체는 76만7천5백42개사(99.4%)였다.

"1억 총 중산계급"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한국에서는 자본주의 정신, 즉 경제논리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방 후 강행된 한글 전용 탓에 고전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논어에 있는 "애지능물노호(사랑하는 자에게는 노동을 시키자)" "균무빈
(균등해지면 빈곤은 없어지게 된다)"이라는 문장은 "불로소득 배격" "균등
주의"를 나타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산 정약용은 "사(선비)"는 "조출경야귀독(아침에는 나가서 일하고 밤에
돌아와서 공부한다)"이라고 했다.

또 "손부익빈이균제기산(부를 덜어서 빈을 구해주면 균등사회가 이루어
진다)"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다산은 "불로소득 배격" "균등사회"를 주장했다.

우리나라에도 자본주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개인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는 마음이 든든하다.

현대건설 이종수 이사로부터 며칠전 아침 5시반 정주영 명예회장이 회사에
출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필자는 놀랐다.

다산사상(불로소득 배격정신.균등주의)에다가 율곡이 선조에 건의한
"정심" "용현" "안민" 등 율곡사상을 합친 "율다사상"이 21세기에 한국을
이끌어갈 자본주의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구의 최상부 10% 소득이 최하부 10% 소득의 8.5배가
되는 불균등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한자를 부흥시켜 학문과 윤리(정신적 자본)의 경쟁력을 향상
시키는 길만이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