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김대중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기 직전, 모처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 경호상 필요하니 주민등록번호를 대라는 것이었다.

입만 벌렸다하면 정보화를 외치면서 워싱턴 특파원의 주민등록번호 하나도
자체 데이터 베이스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정보화가 무슨 정보화냐는 의문이
일었다.

더욱이 김대통령은 98년 6월에도 워싱턴을 방문했었고 그 때도 똑같은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준 뒤끝이었다.

전국민을 전산화했다는 행정전산망은 무엇에 쓰자는 것이냐는 반발심리가
꼬리를 물었다.

국내의 정보화가 구호에 그치고 있는 사이 바깥세상의 변화는 어지러울
정도다.

그 대표적 단면이랄 수 있는 AOL과 타임워너의 결합이 발표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스티브 케이스 AOL회장을 "21세기의 인물 (비즈니스 위크)"로 부를 정도의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이 세기적 뉴스의 여진은 쉽게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성급하게도 미국신문들은 "결혼 이후"의 모습까지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둘간의 결합만으로 모든 정보화사회의 필요충분조건이 다 채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접속관문(portal)과 컨텐츠(contents)가 결합됐지만 정보를 실어 나르는
정보도로의 속도는 아직도 거북이 수준이라는 게 그 이유다.

정보화 선진국 미국에서도 "쌍방향 정보고속도로"로 불리는 브로드 밴드를
즐기고 있는 숫자는 현재 1백40만 가구에 불과하다.

2천2백만에 이르는 AOL의 고객들도 56k bps 미만의 접속속도에 묶여있다.

따라서 "브로드 밴드(Broad Band) 선점"을 위한 전쟁이야말로 "정보화열차"
의 차기 중심의제라는 것이 이곳의 지적이다.

케이블 회사, 기존 전화회사, 위성통신업자, 심지어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업자들이면 모두 달려든
이같은 "정보고속도로 전쟁" 덕분에 올해 말까지 1억가구 이상의 미국인들이
브로드 밴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곳의 전망이다.

그렇다고 브로드 밴드를 종착역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 신문들은 정보화 열차가 브로드 밴드전쟁을 끝내고 나면 다음 전쟁터는
각 가정의 부엌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비나 눈이 온다는 기상청의 보도가 전해지면 커피 메이커가 자동적으로
작동되며, 냉장고의 우유가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배달주문을 할 줄 아는
냉장고 등 "머리좋은 가전제품(smart appliances)"은 이미 오래 전부터 들을
수 있는 정보화사회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이같은 "꿈의 부엌(dream kitchen)"은 이미 미국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브로드 밴드 구축은 그 꿈이 실현되는 범위화 질을 무한대로
높여놓고 있다는 것이 이곳의 설명이다.

실제로 월풀이 최근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전자박람회에서 연말까지 인터넷
으로 작동되는 냉장고를 내놓겠다고 발표한 것을 필두로 마이크로 소프트사와
GE 또한 냉장고, 마이크로 오븐 등 거의 모든 가전제품을 인터넷에 연결
(Web-based)하는 작업분야에서 상호 협력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정밀가전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선빔 또한 2001년까지 집안의 시계, 커피
메이커, 전기담요, 믹서, 혈압기, 부엌 콘트롤 패널등을 모두 인터넷으로
묶어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IBM의 TV광고는 보다 선명한 인터넷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주부가 노크소리에 문을 열자 냉장고 수리공이 대문밖에 서있다.

한 부품이 곧 마모직전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주인 대신 이를 미리 감지한
인터넷이 냉장고 수리회사에 이를 통보했기 때문에 달려온 수리공이었다.

이탈리아의 메르로니 에레뜨로도메스티치회사는 작동상태가 회사 인터넷망에
연결되는 세탁기를 이미 지난달 내놓은 상태다.

최근 개각과 함께 총리가 된 박태준씨는 취임 일성으로 "정보화총리가
되겠다"고 했다.

그의 보좌진들은 박총리가 손정의 소프트뱅크회장등과도 친할 뿐 아니라
정보화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구호에 그치지 않는 정보화사회의 실현을 기대해본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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