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 시인 >

까치 한 마리가 깍깍거리며 창밖을 지나간다.

그 소리가 마치 각각 하는 소리 같다.

새 천년 새날에 무엇이든 깨닫고 살라는 소리같아 옷깃을 여민다.

지난 세기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치달려온 세기가 아니었나
싶다.

너무 욕심내다 몇번이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만났고 그 위기때문에
국민들만 혼쭐이 났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문은 굳게 닫혀 벽이 됐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옛 풍습도 인정도 미덕도 다리가 무너지듯 무너져버렸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던 인정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던 정신도,
황금을 돌같이 보라던 청빈도, 고생도 사서 한다던 인내도 지난 세기의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사람나고 돈났지라는 말이,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러면 못쓴다는 말이,
사람행세를 해야 사람이지라던 말이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커피 한잔값이 시집 한권과 맞먹고 옷 한벌이 쌀 한가마 값보다 훨씬 비싼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문득 마음 사랑 칭찬 용서 나눔같은 낱말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행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 하면서 정작 찾아야할 것들은 찾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이 현실앞에서 정신을 찾아야 풍요로운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될까.

밥굶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삶터를 잃은 가장들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풍족한
것보다 풍요로운 삶이 생활의 질을 높인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내일 멸망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선 헌 땅도 새갈이를 해야 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벗기
위해선 새롭게 탈바꿈을 해야 할 것이다.

날아다니는 곤충도 날개를 달고 날기 위해서 완전 탈바꿈의 과정을 거친다.

컴컴한 고치속의 시련과 고통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날아다니는 곤충들은 지독한 시련을 겪고서도 많이 먹지 않고 거저 먹지
않는다.

꽃가루를 옮겨주거나 씨를 날라다 주는 공생관계를 반드시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날개가 없는 것들은 공생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거나
훔쳐 먹고 그것도 모자라 남이 찾아놓은 것을 몰래 먹으며 기생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겠다.

탈바꿈을 하는 것은 털갈이하고는 다르다.

어느 한 부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탈을 바꾸는 것이다.

탈을 바꾸려면 우선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발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결심도 실천도 할 수 없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고 했다.

개인도 나라도 탈바꿈을 할 때인 것 같다.

한마리의 곤충도 탈바꿈을 하기 위해 온갖 시련과 고통을 거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한마리 곤충이 시련과 고통뒤에 날개를 달고 날듯이 개인이나 국가도 어려운
과정을 거친 뒤에 반드시 희망의 길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우리에게는 지금 밥처럼 희망이 필요하다.

용이 품은 여의주가 아니어도 좋다.

올해는 용의 해이니 용의 기운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그 기운으로 우뚝 일어서서 없는 길도 자꾸 가서 길이 되게 하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그것쯤이야 하고 겁내지 않게 됐으면 정말 좋겠다.

정직한 사람들이 더 이상 손해보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만큼 잘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에겐 희망이다.

아프리카 어디에는 절망의 섬 옆에 희망봉이 있다고 한다.

지도에도 없는 길이 희망의 길이지만 그 길이 또 마음의 지도를 만들기도
한다.

희망은 반드시 절망 뒤에 온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처럼 큰 선생은 없고 그 중에서도 절망은 희망의 선생이
된다.

희망의 길은 곧 희망의 나라를 만든다.

희망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자원이 되고 정신이 자원이 되는 나라가 아닐까.

따뜻한 밥과 일터가 많은 나라가 아닐까.

전쟁과 입시와 교통지옥이 없는 나라가 아닐까.

존경할 어른이 많은 나라, 사표가 되는 부모가 많은 나라, 참스승이 많은
나라가 아닐까.

문화가 죽지 않는 나라, 교육이 썩지 않는 나라, 정치가 정화되는 나라가
아닐까.

희망의 나라로 귀순하고 싶다.

새천년 새해에 해맞이한다고 떠들썩하지만 그게 과연 진정한 해맞이일까.

그게 과연 우리의 희망일까.

아무리 새해라도 오늘의 해는 오늘로 진다.

마음안의 해를 뜨게 하는 것, 그것이 더 환한 해맞이, 해의 맞이가 아닐까.

새로운 해가 떴으니 곧 봄이 올테지만 봄은 봄이 돼도 잔설을 남겨놓는다.

꽁꽁 얼었던 얼음은 쉽게 녹지않는 법이다.

이런 저런 위기가 다소 풀렸다고는 하지만 잔설은 남아있다.

얼음이 서서히 녹아 희망의 강물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이야말로 희망이 밥처럼 필요한 때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6일자 ).